유대인을 대량학살한 아이히만은 2차대전 발발 당시 독일군 대위였다. 대량 학살이 진행될 땐 소령이었으며 종전 땐 중령이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의 저자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모습이 수많은 사람을 죽인 악의 화신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이히만은 평범한 군인에 불과했으며 우리가 늘 보는 일상적인 이웃 사람 모습이었다. 아내에겐 사랑스런 남편이었고, 아이들에겐 따뜻한 아버지였다. 직장에서는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으며 정신상태도 정상으로 예의 바른 모습이었다. 

아렌트는 어떻게 아이히만 같은 인물이 그 많은 유대인을 학살할 수 있었을까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본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대량학살은 ‘악의 평범성’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아이히만은 살인죄의 기소에 대해 떳떳하게 항변했다. “유대인을 죽이는 일에 나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나는 유대인이나 비유대인을 죽인 적이 없다” 히틀러의 명령은 국가의 명령이기 때문에 충실히 명령을 수행했을 뿐이며 자신은 공무원에 불과, 오히려 희생자라는 변명이었다. 

“좋은 정부의 신하가 되는 것은 행운이고, 나쁜 정부의 신하가 되는 것은 불운이다. 나는 운이 없었다” 아이히만은 학살에 대한 죄의식을 털끝 만큼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자기변명에 급급한 아이히만에 대해 아렌트는 사유의 무능력과 관련이 있음을 주장했다. “그는 그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했을 따름이다. 그가 한 시기의 가장 악독한 범죄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된 것은 아무런 생각을 갖지 않았다는 점 때문이다” 군인으로서, 행정가로서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지에 대해 전혀 생각지 않고 주어진 일에 성실히 임했지만 수많은 유대인을 죽인 결과를 초래한 것은 인간의 ‘생각하지 않음’에서 ‘악의 평범성’이 생겨나기 때문이라고 했다. 

악행이 상부의 명령에 순응한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것은 ‘악의 평범성’이 주범이라는 것이다. 구속수사가 남발하는 칼바람 세태가 ‘악의 평범성’을 생각나게 한다. 사유는 능력이 아니라 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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