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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수환 전 의성공고 교장
지난 시대 (1950년께) 우리나라 국민 대다수가 농사를 지었다. 힘든 보리농사가 보릿고개에 부족한 식량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10월 중순께 콩이나 팥 등을 베어낸 밭에 심는 밭보리, 벼를 베어낸 논에 심는 논보리가 있다. 이렇게 농지는 잠시도 빌 틈 없는 이모작(二毛作) 농사를 이어간다. 여러 해를 이렇게 반복해도 거름을 많이 주기 때문인지 연작의 피해는 별로 없는 것 같다. 논에 물이 계속 고여서 겨울에도 마르지 않는 논은 ‘일모작 논’이라고 하고 벼를 베어낸 후에는 그냥 놀린다.

보리는 입동 전에 심어야 한다(포항·경주지방에서). 밭보리 심기는 콩을 베어낸 후 며칠간 여유가 있으며, 부드러운 흙에 보리를 심는 것이니 수월하다. 그러나 논보리는 딱딱한 마른 논바닥을 갈아서 심는 것이기 때문에 힘이 훨씬 많이 든다. 가을비가 내려 보리 갈이가 늦어지면 동해를 입어 보리가 얼어 죽는다. 그래서 벼 베기가 끝나면 서둘러 논보리를 심어야 한다. 보리심기 때도 모심기 때처럼 매우 바쁜 ‘가을농번기’가 된다.

이모작 논에서 베어낸 벼는 일주일 정도 마른 논바닥에 그냥 널어 말린 후에 걷어내고 보리를 심어야 하니 대단히 바쁘다. 벼를 걷어낸 후에는 바로 소 훌징이(쟁기)로 갈아서 골을 타야 한다. 진흙이 마른 딱딱한 논바닥을 이렇게 쟁기로 갈면 지름이 5~8cm 정도나 되는 흙덩이가 된다. 이 흙덩이를 깨어서 부드러운 흙이 되도록 해야 보리를 심을 수 있다. 흙덩이를 깨기는 쉽지 않다.

먼저 괭이써레로 흙덩이를 갈아 뭉갠다. 괭이써레는 지름이 8cm, 길이 50cm 정도인 통나무 5개 정도를 7cm 정도 간격을 떼어서 붙여 만든다. 이 괭이써레에 초등학생 정도의 가벼운 어린이를 태우고 소가 끌고 가게 해서 흙덩이를 부순다. 나도 어린 시절 괭이써레 타는 일은 ‘호시’ 탄다고 하면서 즐겨 타면서 보리 갈이 일을 도왔다. 이렇게 해서 좀 작아진 흙덩이를 다시 곰배로 처서 더 부드럽게 해서 보리 씨를 뿌리고 또다시 곰배로 처서 부드럽게 된 흙으로 묻으면 보리 갈이가 다 되는 것이다.

보리 심기에는 밑거름을 많이 넣어야 한다. 마구간 바닥에 깨끗한 마른 볏짚을 깔아주면 소가 밟고 눕고 하면서 좋아한다. 며칠이 지나 바닥에 깐 볏짚이 소의 분뇨에 젖어 축축 해지면 걷어내고 또 다른 새 볏짚을 깔아 준다. 이때 걷어낸 젖은 볏짚을 퇴비장에 쌓아 여름 동안 썩혀 퇴비를 만든다. 이 퇴비가 가을철 보리 갈이의 요긴한 밑거름이 된다. 농가 마당 한편에는 퇴비장이 필수적으로 있다.

가을에 이렇게 심은 보리가 물이 얼기 전에 알맞게 자라나서 그대로 월동을 해야 다음 해 초봄부터 왕성하게 잘 자란다. 겨울 동안 땅이 얼고 녹고 하는 사이에 딱딱하던 논바닥 흙은 많이 부드러워진다. 또 겨울에 흙이 얼어 부드러워지는 동안 보리 뿌리가 들떠서 공간이 생기기 때문에 보리 싹을 발로 밟아 주는 것이 좋다.

추위가 풀리는 초봄이 되면 아이밭매기를 해서 늦지 않게 풀을 뽑아 주어야 한다. 밭매기 후에는 윗 비료를 주어야 한다. 아이밭매기 한 후 15~20일 정도 지나면 다시 두벌 밭매기를 한다. 밭매기로 풀을 뽑아준 보리는 따뜻한 봄의 훈풍에 생기가 살아 무럭무럭 잘 자라서 4월이 되면 청보리가 패기 시작하고 5월을 지나는 사이에 더욱 왕성하게 자라서 6월에는 보리가 누렇게 익는다. 다 익은 보리는 베어서 보리 타작을 한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는 옛시조의 노고지리(종달새)가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런데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 보리를 베어내는 날은 보리밭 위에 떠 있는 종달새를 자주 볼 수 있었다. 상투 머리 종달새다. 날아 달아나지 않고 머리 바로 위 한 길쯤 높이에 떠서 쪼굴쪼굴 소리를 내면서 날개를 흔들어 한 자리에 떠서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머물러 있다. 이 경우는 대개 종달새의 알둥지가 근처의 보리밭에 있어서 둥지를 지키려는 어미 종달새의 안타까움을 나타내는 모습인 것이다.

햇보리를 거두어들이면 보릿고개(춘궁기)라고 하는 어려운 시기가 끝나고 보리밥이라도 배불리 먹을 수 있게 된다. 풋벼로 찐쌀을 만들듯이 풋보리로 떡보리를 만든다. 덜 익은 풋보리를 훑어서 삶은 후 알맞게 말리어서 디딜방아로 찧으면 좀 찐득한 떡보리쌀이 된다. 푸른색이 나고 구수하고 맛있는 별미 간식이 된다. 배고프던 시절의 간식이다. 그러나 덜 익은 곡식이 아까워서 많이는 못 한다. 이런 보리농사도 지난 시절의 이야기이고 보리 향기가 은은한 멋있는 청보리밭 들녘은 사라졌다. 보리밭 사잇길도 추억 속의 지난날의 풍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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