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원.jpeg
▲ 이재원 경북생명의숲 상임대표·화인의원 원장
조나라 혜문왕이 진왕과 목숨을 건 회담을 통해 자신을 구해준 인상여를 재상에 임명하자 염파 장군은 인상여가 자신보다 지위가 높은 데 대해 불만을 표시했다. “나는 장수로서 늘 목숨을 담보로 적과 싸워 큰 공을 세웠는데 인상여는 단지 혀와 입으로만 나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했다. 그를 보면 반드시 모욕을 주겠다”고 공언한다.

그 소리를 전해 들은 인상여는 조회 때마다 염파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먼저 몸을 피했다. 이런 인상여의 태도가 못마땅했던 그의 추종자들이 “우리가 나리를 섬기는 이유는 나리의 높은 절개와 강인함과 충성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리는 염파 장군보다 지위가 높음에도 거짓 모함을 일삼은 염파를 피할 뿐입니다. 이는 부끄러운 일로 이제 우리는 나리를 떠나고자 합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인상여는 “내가 진왕을 욕보인 사람인데 염파 장군을 두려워하겠는가? 막강한 진나라가 조나라를 침공하지 못하는 이유는 나와 염 장군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서로 싸운다면 진나라의 침략을 돕는 일이 될 것이다. 내가 염파를 피하는 것은 국가의 일을 먼저하고, 사사로운 원망을 뒤로하기 때문이다”라며 이들을 타일렀다.

이는 중국의 역사서 ‘사기열전’ 중 ‘염파와 인상여 열전’에 나오는 대목으로 공사(公事)를 먼저 하고 사사(私事)를 뒤로 미룬다는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유래이다. 선공후사는 공적인 목적을 위해 사적인 감정이나 이해관계 등을 포기하는 ‘멸사봉공’(滅私奉公)과 같은 말로 공직자들이 삼아야 할 금과옥조이다.

지난 15일 국회 헌법개정·정치개혁특별위원회가 첫 회의를 열어 개헌 정국의 막이 본격적으로 올랐다. 하지만 첫날부터 보란 듯이 개헌과 정치개혁에 대한 국민의 뜨거운 열망에 찬물만 끼얹었다. 그야말로 국가백년대계인 개헌문제를 다루면서 선공후사의 정신은 아예 없고, 오직 ‘선당후사’(先黨後私), 즉 당리당략만을 앞세운 논쟁만 이어졌다.

여당인 민주당은 지난 1년간 특위에서 충분히 논의했으니 오는 2월 중에 개헌안을 도출하자는 입장이지만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은 이에 맞서 지방선거 동시 개헌 투표저지를 위한 장외투쟁을 전개했다. 그 틈에 선 국민의당은 국회주도 개헌과 동시투표를 제안했다. 이러한 입장이나 힘겨루기의 속내는 결국 지방선거에서의 유·불리에 있고, 개헌 시기에 따라 6·13지방선거의 판도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개헌 정국에서 인상여의 선공후사 정치는 찾아보기 어렵다. 선당(先黨)을 버려야 개헌이 산다. 반대로 선당(先黨)만을 고집한다면 자칫 개헌은 죽을 수도 있다. 정치권은 이제 새로운 대한민국의 초석이 될 개헌에 모든 지혜를 모아나가야 한다. 이는 국민이 내리는 엄중한 명령이다.

이번 개헌의 핵심은 ‘권력구조’와 ‘지방분권’에 있고, 내용 또한 복잡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권이 당리당략만 배제한다면 개헌은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이번 개헌 정국과 연동해 선거제도 개혁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선거제도의 개혁은 개헌의 선결과제가 될 정도로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오히려 개헌보다 더 어렵고 복잡한 문제이지만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여느 때보다 선공후사의 정신이 우리 정치에 필요한 시기이다. 그러나 작금의 철새 정치와 개헌 정국 등 정치권이 보여주는 모습은 온통 선당후사(先黨後私), 선사후사(先私後私)뿐이다. 선공(先公)은 고사하고 후공(後公)조차 찾아볼 수 없다. 국민은 공(公)이 실종된 정치 상황 속에서 인상여 같은 선공(先公)의 정치인을 고대하고 있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