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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용섭 전 한국국학진흥원부원장
경남 진주에서 친구를 시켜 자신의 친어머니를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과거 같으면 끔찍하여 입에 담기조차 어려운 이야기다. 실제 조선 선조임금 시대 안동에서 친모를 살해한 적자지변(賊子之變)이 발생하자 부사(府使)와 판관(判官)은 파직되고 안동부는 안동현으로 강등하였다. 5년 후 류운룡 등의 복호(復號) 상소 끝에 다시 부(府)로 승격되었지만, 이처럼 강상을 범하는 범죄는 비난과 책임추궁이 심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이 같은 일이 너무나 자주 발생한다. 부부간에도 살인이 일어나고 학교에서 학생이 자살하고 늙은 부모를 구타하며 선생님을 폭행해도 이젠 이상한 나라의 이야기가 아닌, 거의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 이 모두의 배경에는 우리 사회에 경제적, 금전적인 가치를 지나치게 중요시하고 인의라는 인간적, 윤리적 가치는 형편없이 소홀히 취급되기 때문이다. 맹자에 따르면 인(仁)은 남에게 차마 못 하는 마음이요 의(義)는 인간이 걸어가야 할 바른길이다.

도시의 아파트를 방문하다 보면 특별히 어린이가 인사 잘하는 곳이 있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낯선 이에게도 인사하는 모습이 참으로 예쁘다. 알아보니, 그 마을의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이 특별히 열성적으로 강조해서 그렇다 한다. 착한 사람도 아름다운 일도 많다. 그런데 그 배경에는 교육이 있다. 교육은 꼭 남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도 할 수 있다. 프랑스의 루소는 건강 악화나 사회적 비난 등 어려울 시기에 봉착할 때마다 철저한 자기교육을 통하여 자신을 쇄신했다.

오늘날 충효(忠孝)는 봉건시대의 윤리로 무시된다. 충효를 강조하면 반 진보적인 이상한 사람이 된다. 특히 젊은이에게 그런 대접을 받을 수 있다. 그럼 올림픽에서 우리나라 선수를 응원하는 것이 충(忠)의 연장인데, 그게 왜 봉건적인가? 늙은 부모와 노인을 돌보는 경로는 곧 효(孝)의 연결인데, 이게 왜 반 진보적인가?

윤리는 국가적으로도 중요하다. 한 나라의 생산성을 높이고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요소에 사회적 자본이 될 수 있다. 비윤리적인 인간관계는 사회의 제 요소의 협력과 국가 경제의 원활한 흐름을 저해한다. 공자와 맹자는 국가경영의 최고가치로서 인의(仁義)를 주창했다. 현대적 개념으로 인은 배려와 소통, 공감과 관용이요 의는 정직과 염치, 정의와 신뢰다. 정치문제의 판단과 해결에 인의의 원칙은 고리타분하게 느껴지지만, 21세기의 지금에도 작동하는 원리요 사회적 자본의 원천이다. 즉 국가 간에도, 국내문제 해결에도 인의의 마음이 필요하다.

여야(與野)나 노사(勞使)간의 협상이나, 미국· 중국· 일본을 상대하고 북한과 교섭하는 과정에서도 인의의 원칙은 적용될 수 있다. 평창올림픽과 연계하여 북한과의 교류가 시작하였다. 북한을 포용하는 것은 인(仁)이나 그것이 어리석음으로 흐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인이란 덕목에 어리석을 ‘우(愚)’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현송월 단장에 대한 접빈도 의(義)에 맞게 하면 된다.

북한이 국제사회에 비난을 받는 가장 큰 이유는 어질지 못하고 신의를 안 지키기 때문이다. 즉, 인의가 부족하다. 고모부와 이복형을 잔인하게 죽이는 자에게 모두 머리를 조아리니, 인도 아니고 의도 아닌 것이다. 인의는 오래된 개념이지만, 이 시대에 맞게 재해석하고 학교나 사회에서 널리 가르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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