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개지 4300년, 우렁찬 함성으로 종합제철 공단 첫 삽
1967년 10월 3일은 개천절이자 한가위 추석 명절이었다.
수백 명 아니 수천 명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손자의 손을 잡고 발걸음 재촉하는 촌로에서부터 명절을 맞아 한복을 잘 차려입고는 트럭과 버스, 를 타고 행사장으로 달려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날, 오후 2시, 영일군 대송면 송내리에는 수만 명의 인파가 모인 가운데 <종합제철 공업단지 기공식>이 개최됐다. 황량한 모래벌판을 세계 굴지의 제철공업단지로 탈바꿈시키는 ‘영일만 드라마’의 첫 1막이 오른 것이다.
종합제철 입지선정에서 막판 극적으로 1위를 차지해 종합제철 입지로 포항이 최종 확정된 것이 1967년 7월 7일. 그로부터 보름만인 7월 22일, 범시민 환영대회가 열렸으며 불과 2개월 남짓 만에 정부주관의 ‘영포지구 종합제철 공업단지건설기공식’이 열리게 된 것이다. 종합제철에 대한 정부의 강력한 집착 때문이었을까?
이 기공식은 제철소가 들어선 후 조업을 지원하기 위한 기반시설 즉, 도시토목을 비롯 공업용수, 항만철도 등의 인프라를 구축하는 사업으로 1970년 4월 1일 착공식을 가진 포항제철소 공장건설 기공식과는 달랐다.
입지결정으로 종합제철 조성사업이 골격을 갖추기 시작하자 정부에서는 곧장 영일군 대송면 일대를 종합제철 연관공업단지 조성지구(제1연관단지)로 공고하고 경북도지사를 단지조성 시행자로 지정 한 것이다
모두 345만 평의 이 공업단지는 연산 조강능력 300만 톤 규모의 종합제철 공장용지 200만 평을 비롯 연관 공장용지 l00만 평, 기타 45만평의 규모로 돼있는데 우선 1단계 사업으로 연간 60만 톤 생산을 위한 70만평의 공업단지조성을 계획하고 첫 삽을 뜨는 행사였다. 이 1단계 사업을 위해 정부는 총 71억2100만 원의 지원비를 투입, 70년까지 공장건설과 지원시설을 함께 완성 시킬 계획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행사를 앞두고 며칠 전부터 포항과 영일 지역에는 박정희 대통령이나 정일권 국무총리가 ‘종합제철단지 기공식’에 참석한다는 소문이 떠돌았기 때문에 명절 아침 일찍부터 행사장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끝없이 이어졌다.
‘국가기록원’에 소장 중인 건설부와 경제기획원이 2월에 미리 작성한 ‘종합제철 공업단지 기공식 계획’에 따르면 대통령을 비롯한 내빈 250명과 국내외 기자 100여 명이 참석하는 것으로 돼 있었다. 그러나 이날 기공식에는 대통령도. 국무총리도, 9월 말께 ‘종합제철건설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 내정된 박태준 대한중석 사장도 참석하지 않았다.
“개천개지(開天開地) 한 지 4300년 만에 우리나라 최대의 철강단지를 5개국 차관으로 건설하게 되었으며, 종합제철의 승패 여부가 곧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성패를 가늠하는 만큼 강철같이 굳센 책임감과 철석같은 단결로 이를 성취해 달라”는 짧은 치사를 하고 내려왔다.
현장에서 생중계를 하던 방송국 아나운서뿐만 아니라 멀리서 연설을 지켜보던 시민들도 깜짝 놀랐다. 이처럼 부총리가 짧은 연설만 하고 황급히 내려간 것은 행사장으로 오는 도중 정오 라디오 뉴스를 통해 자신의 실각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랬다, 장부총리의 마지막 연설내용처럼 종합제철 건설은 2차 경제개발사업의 핵심이었다. 1966년 7월 29일에 확정된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안에 따르면 금속공업 부문은 1단계로 50만 톤 규모의 종합제철공장을 1971년에 완공하도록 되어 있었다. 특히, 종합제철사업은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상징사업 이자 최대 역점사업 이었던 만큼, 당시 박정희 정권은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종합제철사업을 관철 시키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별도 박스
종합제철 건설을 진두지휘해 온 장기영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이 공교롭게도 종합제철 공업단지 기공식 날 전격 경질된 것은 박정희 대통령과 박태준 종합제철건설추진위 위원장 내정자의 행사불참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당시 장부총리와 함께 종합제철건설사업을 추진했던 황병태 경제기획원 지역협력국장의 ‘회고록’에 따르면 장부총리는 기공식 전날 10월 2일 청와대에서 종합제철건설사업 전반에 대한 브리핑을 하던 중 대통령에게 호된 질책을 들었다, 이유는 기공식 일정을 상공부 등 관련 부처와 청와대에 알리지 않고 독단적으로 정하고 추진했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대통령도 모르는 기공식? 이런 콩가루 집안이 있느냐?”며 격노했다고 한다. 그래도 장부총리는 행사일정을 밀어붙이고 헬기 편으로 포항으로 향해 행사장 도착 불과 몇 분전 라디오뉴스를 통해 자신의 실각소식을 들어야 했다, 물론 장부총리 결정도 이유는 있다, 국제차관단과의 협상이 지지부진해지자 ‘돌파구’ 마련을 위해서는 차관단 집행부를 참석시킨 가운데 서둘러 기공식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1967년 9월, 정부는 대한중석 박태준 사장에게 ‘종합제철건설추진위원회 위원장’ 내정을 통보했으나 외국 출장 중이던 그는 외국 차관이 대한중석에 의해 교섭되어야 하며 자금부족액은 정부 재정자금으로 충당해야 하고 민간주주에 대한 배당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을 요구했다.
9월 30일 귀국한 박태준은 이러한 문제점이 해결되지 않으면 추진위원장을 맡을 수 없다는 의견을 피력하며 장부총리와 대통령의 질타에도 불구하고 기공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는 차관단과 합의 각서에 중대한 결함이 있어 첫걸음부터 허술하면 국가 대사를 그르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종합제철 건설의 실질적 책임자가 될 사람으로서 사전에 충분한 준비도 없이 무작정 기공식에 참여할 수 없다는 뜻을 끝까지 굽히지 않았다. 결국 박태준의 우려대로 KISA는 1년 후 제철소건설에서 발을 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