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뮌스터슈바르자흐수도원 소장

양봉요지 반환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은 지난 27일 오전 8시 30분(현지시간) 독일 뮌스터슈바르자흐(Abtei M?nsterschwarzach) 수도원에서 양국 관계자가 참석한 가운데 ‘양봉요지’ 반환식을 개최했다고 밝혔다.

‘양봉요지’는 독일인 카니시우스 퀴겔겐 신부(한국명 구걸근 신부)가 한국 최초 남자 수도원인 서울 백동(혜화동)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서양의 양봉기술을 한국에 보급하기 위해 지난 1918년 국문으로 제작한 우리나라 최초의 양봉 교육교재다.

이 책은 등사본 150권이 발간됐으며, 발간된 직후 몇 권이 독일 수도원들로 보내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현재까지 확인된 바로는 뮌스터슈바르자흐 수도원에 있는 것이 현존하는 유일본이다.

‘양봉요지’는 왜관수도원 역사 자료들에 그 존재가 간략하게 언급되고 있었다.

2014년 왜관수도원에 선교사로 파견돼 있는 바르톨로메오 헨네켄 신부(한국명 현익현)가 독일 휴가 기간 중 독일 여러 수도원을 방문하여 책이 보존돼 있는지를 확인했고, 자신의 모원인 뮌스터슈바르자흐 수도원 도서관에서 이 책을 발견했다.

그 후 이 책의 중요성에 비추어 한국으로 반환받는 것이 가능할지 두 수도원간에 논의가 시작됐다.

다행히 출판된지 100년이 되는 해에 영구대여 형식으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됐다.

반환식에는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수도원장인 박현동 아빠스, 뮌스터슈바르자흐 수도원의 미카엘 리펜 아빠스와 수도자들, 백선기 칠곡군수, 국외소재문화재단 지건길 이사장이 함께 참석했다.

이번 ‘양봉요지’ 반환은 1909년부터 동북아시아 선교를 담당했던 성 베네딕도회 오딜리아 연합회(모원: 독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의 형제 수도원인 왜관수도원과 뮌스터슈바자흐 수도원 간의 협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반환식에서 미카엘 리펜 아빠스는 ‘뮌스터슈바르자흐 수도원 수도자들이 왜관에서 어떤 활동들을 했는지 언급’했다.

미카엘 리펜 아빠스는 “왜관수도원과의 형제 관계 안에서 이 책을 왜관수도원에 영구적으로 맡기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100년만에 이 책이 한국에 가게 됐는데, 하느님의 창조물인 벌들과 자연에 대한 사랑이 왜관에서도 꽃피기를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 양봉요지 교재
왜관수도원에서는 이 책의 존재가 알려진 다음부터 여러 관계자들과 함께 논의를 하며 한국 반환을 추진해 왔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사장 지건길)과는 지난 2005년 10월 독일 상트오틸리엔 수도원 소장 ‘겸재정선화첩’이 베네딕도회의 한국 선교 100주년을 기념해 영구대여 방식으로 왜관수도원으로 반환되는 선례를 바탕으로 적절한 반환 방식과 반환 이후의 학술연구, 보존 방식, 영인본 제작 등과 같은 실무적인 작업에 도움을 받았다.

칠곡군(군수 백선기) 역시 적극적으로 반환에 힘을 보탰다.

칠곡군은 우리나라 유일의 양봉 특구고 아카시아 나무 최대 군락지로 매년 양봉 관련 축제를 진행하고 있다.

이 책의 존재가 알려지자 백선기 군수는 칠곡군 농업기술센터를 통해 ‘양봉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가로쓰기 현대어로 해제본을 제작했고, 지난해 3월 미카엘 리펜 아빠스가 왜관수도원을 방문했을 때 이 책의 중요성에 대해 양봉관련자들과 함께 설명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많은 분들이 양봉요지의 한국 반환을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달하기도 했다.

양국 수도원간에 이 문제를 계속 논의하는 와중에 박현동 아빠스는 지난해 10월 뮌스터슈바르자흐수도원을 방문해 미카엘 리펜 아빠스와 영구대여 방식으로 한국으로 반환하는 것에 대해 논의했고,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 장로회의 결정을 거쳐 이달 27일 반환식을 하게 됐다.

반환식은 미카엘 리펜 아빠스가 박현동 아빠스에게 ‘양봉요지’를 인계하는 방식으로 진행됐고, 반환식 후 비행기로 국내에 반입됐다.

카니시우스 퀴겔겐 신부(한국명 구걸근 具傑根, 1884∼1964)는 1907년 10월 20일 독일 파사우 인근 성 베네딕도회 슈바이클베르크 수도원 소속의 수도자로 첫 서원을 했다.

1909년 7월 2일 사제로 서품이 됐다. 1911년 1월 6일 서울 백동(현 혜화동) 성 베네딕도 수도원에 선교사로 파견됐다. 후에 만주 연길의 성 십자가 수도원에서도 생활했다.

1921년 만주 팔도구 성당 주임신부, 1923년 육도포 성당 주임신부, 1924년 훈춘 성당 주임신부를 했으며, 1931년 당시 한국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연길상시에 성당과 학교를 설립했다.

만주에서 선교사로 생활할 때 각 성당이 관할하던 지역마다 수십 개의 학교를 건립했다.

1946년 중국 공산당에 의해 연길 성 십자가 수도원이 폐쇄되고 북한의 남평 수용소에 감금돼 수용소 생활을 했고, 1950년 12월 24일 연길을 떠나 1950년 초에 독일의 슈바이클베르크수도원으로 귀환했다. 1953년 12월부터 1955년 말까지 부산의 독일 적십자 병원에서 수석 통역사로 봉사했고, 1956년 본국으로 돌아가 1964년 5월 12일 선종했다.

서울 혜화동의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찍은 걸로 추정되는 양봉을 하는 사진이 남아 있고, 1925년 당시 한국을 방문하여 방대한 필름 기록을 남긴 노르베르트 베버 아빠스가 제작한 무성영화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에 나오는 독일인 선교사 중 한국민들과 친근하게 어울리기 위해 장기를 두는 독일인 선교사가 카니시우스 퀴겔겐 신부로 추정된다.

양봉요지
퀴겔겐 신부는 ‘양봉요지’뿐만 아니라, 독일인 선교사의 한문 공부를 위해 1915년 ‘요한덕해(要漢德解)’라는 독어-한자 사전을 저술하기도 했다.

2018년은 만주에 있었던 연길교구 설정 90주년을 맞는 해인데, 이 양봉요지는 독일 선교사들이 동북아시아에서 했던 선교활동을 재조명하는 계기도 될 듯 싶다.

이번 반환은 2005년 10월 독일 상트오틸리엔 수도원 소장 ‘겸재정신화첩’이 베네딕도회의 한국 선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영구대여 방식으로 왜관수도원으로의 반환에 이어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 소속 수도원의 반환이어서 더욱 의미가 크다.

이번 반환은 양봉요지 출판 100년 만에 한국으로의 반환이라 그 의미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왜관수도원-국외소재문화재재단-지자체(칠곡군) 간 협업에 의한 환수의 모범사례로 기록될 수 있다. 향후에도 이와 같은 반환이 지속해서 이뤄지길 기대하는 분위기다.

‘양봉요지’는 왜관수도원에서 모든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올해 3월 칠곡군이 개관하는 꿀벌나라테마공원에서 전시를 통해 국민에게 공개될 예정이다.

박태정 기자
박태정 기자 ahtyn@kyongbuk.com

칠곡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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