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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노인과 바다’(헤밍웨이)는 불후의 명작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 제목을 늘 ‘바다와 노인’으로 기억합니다. 그런 기억의 왜곡은 자기도 모르는 어떤 트라우마의 개입일 때가 많습니다. ‘바다’가 크게 느껴질 수밖에 없고, ‘노인’이 뒤로 가야만 하는 모종의 ‘무의식’이 제게 있는 모양입니다. 원인을 없앨 수는 없지만, 왜곡 자체는 의식이 강력하게 대응하면 한 발 물러섭니다. 아마 이 글을 쓰고 나면 저의 그 ‘못된 버릇’도 어쩔 수 없이 교정되리라 믿습니다. 보통 명작들은 학창시절에 접합니다. 소년기나 청년기의 영혼에 요긴한 자양분을 공급합니다. 그러나 어린 영혼들은 명작의 가치를 충분히 섭취해낼 수가 없습니다. 아직은 그것들을 빨아들일 만한 튼튼한 뿌리가 없습니다. 인생은 척박한 땅과 같아서 스스로 깊게 내려가지 않으면 아무것도 주지 않습니다. 강한 뿌리 위에서 홀로 서지 못하면 더 이상 눈부신 태양을 볼 수가 없습니다. 명작들은 그런 ‘뿌리내리기’, ‘태양 아래 홀로서기’를 보여주는 것들입니다. 발아기의 어린 영혼들이 그것들의 의미와 가치를 온전히 다 체득할 수는 없습니다.

명작의 가치는 재독(再讀)에 있다는 말이 그래서 나옵니다. 이때 재독은 단순히 ‘두 번 읽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앞서 읽지 못한 것을 읽어내는 독서는 모두 재독입니다. 열 번을 읽어도 새로운 내용을 읽을 수 있다면 그 독서는 재독이라는 겁니다. 물론 제 주장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노인과 바다’를 재독 했습니다. 이번 재독에서 제게 읽힌 것은 ‘소년’이었습니다. 망망대해에서 홀로 벌이는 청새치와의 사투 장면도 여전히 좋았지만, 이번에는 소년이 등장해서 삶의 순환이 그려지는 수미일관(首尾一貫)의 작품 구성이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노인’이 ‘바다’ 앞에 놓여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인 것도 같았습니다. ‘승리하는 인간’이라는 드러난 주제보다도 소년을 바라보는 따듯한 작가의 시선이 더 보기에 좋았습니다.

노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늙어 버렸지만, 그의 두 눈만은 바다색과 꼭 닮아 활기와 불굴의 의지로 빛났다.

“산티아고 할아버지.”

소년은 조각배를 끌어다 놓은 해안 기슭을 함께 올라가며 말했다.

“다시 할아버지와 고기잡이 나갈 수 있어요. 그간에 돈 좀 벌었거든요.”

소년에게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준 사람은 노인이었다. 그리고 소년은 노인을 사랑했다.

84일 만에 강적 청새치를 만난 노인은 사투 끝에 승리합니다. 청새치와 사투를 벌이며 노인은 “형제여 와라, 우리 중 누가 죽어도 좋다”라고 웅얼거립니다. 노인에게 청새치는 자신의 삶의 터전, 바다에서 볼 수 있는 가장 멋진 상대, 사랑하는 형제입니다. 그 승리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므로 눈에 보이는 어획(漁獲)은 아무런 의미가 없지요. 오직 영혼만이 중할 뿐입니다. 그 멋진 삶, 형제를 알아보는 사투의 정신이 노인에게서 소년에게 계승되는 것을 작가는 잘 보여줍니다. 그렇게 보면 주인공은 소년입니다. 노인이 된 작가가 쓴 소설이라면 더 그렇습니다. 소년이 없으면 이 소설은 고작 신화의 아류로 떨어집니다. 소년이 없으면 노인은 시지프스나 아킬레스의 아바타가 될 뿐입니다. 그러나 소년이 등장하면서 노인의 이야기는 인간의 이야기가 됩니다. 인용한 이 소설의 서두는 소년의 시점에서 노인을 설명하고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이 소설의 또 다른 제목은 ‘소년과 바다’입니다. 노인(작가)은 자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개를 보여줍니다. 소년을 보여주고 바다(청새치)를 보여줍니다. 노인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을 수 있는 곳이 바로 그 두 장소(場所)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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