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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식 포항지역위원회 위원·시인
영화 장면과 현실 상황이 우연히 일치할 경우가 생긴다. 한 해가 바뀌는 무렵 방영된 ‘설국열차’가 그랬다. 간단없이 질주하던 기차는 예카테리나 다리를 통과할 즈음 설국 18주년 새해를 맞는다.

처절한 살육전을 벌이던 탑승객은 싸움을 멈추고 ‘해피 뉴 이어’를 외치며 축하를 나눈다. 일순간 야릇한 감상에 빠졌다. 제야의 종소리와 함께 2018년이 펼쳐진 그 시각쯤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예카테리나 다리는 실제로 존재하는지 모르나 친근하게 다가온 고유 명사였다.

러시아 역사에서 ‘대제’로 칭하는 인물은 둘뿐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한 표트르 1세와 여제 예카테리나 2세. 그녀는 프로이센 공국 출신으로 현명한 여자였다. 남편의 황위를 빼앗아 귀족들 위주의 정책을 펴면서 지지를 얻었다. 황권이 공고해진 결과를 낳았다. 불행한 결혼 탓이긴 하지만 군대를 이끄는 연인도 두었다. 정권 유지에 버팀목이 되는 무력의 방편이기도 했다.

에르미타주 미술관의 명물 ‘황금 공작 시계’는 여제의 정부이자 훌륭한 장군인 포템킨이 선물한 것이다. 영국서 제작된 시계로 특정한 시간에 공작새가 찬란한 날개를 펴면서 수탉이 홰를 친다. 그 광경을 보고자 한동안 머물렀으나 마주치진 못했다.

유럽의 명소는 성당 투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딜 가나 유서 깊은 성지가 눈길을 끈다. 동방정교회를 믿는 상트페테르부르크도 그렇다. 비극적 사연을 간직한 성전도 여럿이다. 모자이크 그림이 화려한 ‘그리스도 부활 성당’은 일명 ‘피의 성당’으로 불린다. 제국의 12번째 황제가 암살당한 자리에 세워져서다.

북방의 강국 스웨덴 침략을 막고자 설치한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에도 회당이 있다. 주로 정치범 수용소로 사용된 장소라 슬픔이 자욱하다. 혁신에 반대한 황태자와 갈등을 빚은 표트르 대제는 공개 재판으로 사형에 처하고자 했으나, 고문을 당한 알렉세이는 이곳의 감옥에서 숨졌다.

페트로파블롭스크 교회 안에는 제정 시대 황제와 가족이 묻혔다. 초대 표트르 1세부터 마지막 니콜라이 2세까지 14명의 군주 가운데 12명이 잠들었다. 입구 오른편 니콜라이 2세 가족묘는 연민이 차올랐다. 볼셰비키 혁명 다음 해 총살당한 영화의 엔딩신이 떠올라서다. 황후와 아들딸 다섯과 더불어 군복을 입은 가족사진도 연상됐다. 정치란 비정하고도 무자비한 세계다. 애꿎은 자녀들 운명이 안타까웠다.

문화예술의 심장부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표트르 대제가 추진한 개혁의 상징물이다. 선진 유럽 문물을 수입하고자 수도를 옮겼고, 쇄신을 방해한 자식을 죽일 정도로 의지를 쏟았다. 그는 태평양 연안까지 영역을 확장하면서 오늘날 러시아 기틀을 다졌다.

국가의 기본적 존재 가치는 안보와 식량의 확보라고 여긴다. 변혁을 추구한 표트르 대제가 가장 중시한 역할도 국방이었다. 먼저 신도시를 지킬 방어 기지부터 구축했다. 그래선지 몰라도 실전에 운용되진 않았다.

최근 시오노 나나미의 ‘그리스인 이야기’ 제2권이 출간됐다. 제1권 이후 반년만이다. 그녀는 어느 독자의 감상문을 소개한다. ‘민주 정치는 안전보장과 표리일체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요지다. 이에 덧붙여 저자는 말한다. 아테네가 추구한 민주 정치는 전쟁터에 동원할 병사의 수를 늘리려는 의도가 숨겨졌다고. 지도자 클레이스테네스는 이를 간파한 덕분에 스파르타의 6배나 되는 병력을 가졌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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