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핏줄 속에 지독한 독서광의 DNA가 있었다. 간서치(看書癡), 즉 ‘책만 보는 바보들’이이란 말이 있을 정도 아닌가. 조선 선비 김득신의 이야기부터 들어보자. 괴산 취묵정에 걸려 있는 ‘독수기’에 아둔한 독서광의 믿기 어려운 사실들이 기록돼 있다. 독수기는 득신이 34세 때부터 67세 때까지 34년간 읽은 고문의 횟수와 목록이다. 1만 번 이상 읽은 책 36편의 문장을 나열하고 각 편의 읽은 횟수와 읽은 이유를 밝혔다.

독수기에는 기네스 기록에나 오를 법한 숫자들이 나온다. 사기의 ‘백이전’은 1억3000번을 읽었다고 썼다. 당시 1억은 10만을 이르기 때문에 실제 읽은 횟수는 11만3000번인 셈이라 한다. 득신은 이 기록을 기념하기 위해 그가 책을 읽었던 취묵정 정자 이름을 ‘억만재(億萬齋)’라 불렀다 한다.

‘설마 그렇게 많이 읽었을까’ 하는 일반적인 의문을 정약용도 가졌던 모양이다. 약용은 “백이전을 하루 100번 읽으면 1년에 3만6000번, 3년에 10만8000번 읽을 수 있지만 일상생활을 전폐하고 읽을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4년은 걸리며 나머지 글을 읽은 횟수를 합치면 모두 51만7000번이기 때문에 순수하게 20년이 걸린다”며 실학적으로 따졌다. 한마디로 믿지 못하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득신이 간서치임에는 분명했다.

정조 시대 규장각 검서관으로 활약하면서 편찬 사업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학자 이덕무는 스스로 ‘간서치’라 할 정도로 늘 책을 가까이 했다. 친구 박지원은 이덕무가 죽은 뒤 쓴 행장에서 “늘 책을 볼 때면 그 책을 다 읽은 다음에 꼭 베끼곤 했다. 그리고 항상 작은 책을 소매 속에 넣고 다니면서 주막이나 배에서도 보았다. 그래서 집에는 비록 책이 없었지만 책을 쌓아둔 것과 다름없었다. 평생 읽은 책이 거의 2만 권이 넘었고, 손수 베낀 문자가 또한 수백 권이 되었다”고 했다.

이런 독서 DNA는 어디로 갔는지. 문화체육부 국민독서실태조사에서 우리나라 성이 10명 중 4명은 1년에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는 것으로 조사됐다. 김득신이나 이덕무의 DNA를 복제해서 주사를 맞는 방법은 없을까 하는 허황된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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