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입지주들 반발·저항에 종합제철 부지매입 ‘산 넘어 산’

▲ 제철소가 들어서기 전 대송면 동촌동
1. 일사천리 종합제철 건설공사, 부지매입 복병에 '주춤'

1967년7월 입지선정에 이어 시민환영대회와 10월3일 종합제철단지 기공식에 이르기까지 불과 3개월 만에 공단부지 착공까지 초고속으로 치닫던 종합제철건설공사는 10월 하순에 접어들면서 큰 벽을 만나게 된다.

종합제철 입지가 포항으로 확정되자 시민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축제분위기가 몇 달씩 이어졌지만 제철소와 공단부지의 조성을 위한 사유지 매입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편입지주들의 반발과 저항이 컸기 때문이었다. 특히 제철소 편입부지들은 입지발표와 함께 땅값이 치솟아 부지매입을 위한 지가산정과 예산확보에 많은 애를 먹었다.

지금의 포항북부소방서 2층에 건설부의 ‘포항공업지구 공사사무소’가 설치 됐다.
당시 사유지의 매입과 토지보상업무는 경상북도와 영일군이 도맡았다. 또 단군이래 국가최대의 大役事인 종합제철건설의 입지가 포항으로 확정되자 건설부는 공무원을 대거 포항으로 내려 보내 관공서가 밀집한 영일군청(지금의 북구청) 앞 지금의 포항북부소방서 2층에 <포항공업지구 공사사무소>를 설치했다. 건설부 포항공사사무소는 항만건설등 정부차원의 기반조성은 물론 기공식 준비, 편입지역 토지보상 관련 조례안 입안 등 포항제철소 건설에 따른 민감하고 까다로운 업무들을 추진했고 경상북도와 영일군등 자치단체는 부지매수와 건교부를 지원하는 창구역할을 담당했다.

이처럼 중앙정부가 현지에 인력을 파견하고 경북도등 자치단체가 부지매입과 보상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으나 300여만 평에 달하는 사유지 편입지주들을 설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확정된 제철소 대상부지는 모두 350여만 평이었다. 그러나 이 가운데 국유지는 50여만평에 불과했고 나머지 300만평을 매입해야 하는 실정이었다.

포항제철소가 들어서기 전의 동촌동 모습
또 하나의 어려움은 지가산정이었다. 이때는 전문감정기관이 설립되기전 이었음으로 지가산정은 포항소재 5개금융기관이 합동으로 맡았다 여기서 감정된 지가는 다시

경상북도 건설국장과 지역개발과장을 비롯하여 영일군수ㆍ조흥은행포항지점장과 주민대표 2명 등으로 구성된 <토지보상심의위원회>에서 최종결정하였는데 주민의 반발을 고려해 회의장소를 경주나 안강등지로 옮겨 다니며 게릴라식 회의를 해야 했다

그러나 감정가격에 대한 불만은 끊이지 않아 시위가 일어나거나 심의위원회에 참여한 주민대표가 이미 감정 된 지가에 동의하지않아 회의가 유회를 거듭하는 등 부지매입 교섭에는 6개월이상이 소요되는 진통이 이어졌다.

제철소 편입부지내 민가에 살던 주민들
종합제철 단지 조성부지 매입의 어려움을 다룬 당시 언론보도
결국 토지보상심의위원회는 편입부지 보상금으로 평당 398원78전을 제시했다.

이 보상금은 당시의 땅값 시세와 큰 차이가 없었지만 문제는 제철소 입지 인근 땅값이 정부의 종합제철입지 발표 후에 급등했다. 발표 이전인 6월말에 비해 무려 5~10배 나 뛴 곳도 수두룩했다.

하지만 정부도 보상금의 경우 원만한 부지수용을 위해 발표 전이 아니라 급등한 시세를 그대로 반영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일부지주들은 이에 불복하여 중앙과 지방의 토지수용위원회에 이의신청을 내었고, 심지어 정부를 상대로 소송까지 벌였다.

하지만 이 같은 진통에도 주민들의 협조와 경북도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1968년 5월말경 부지매입이 마무리 수순에 접어들고 경북도가 기채까지 발행한 끝에 그해 8월에 부지매입을 모두 마치게 된다.

이렇게 종합제철 건설 편입지역에 대한 부지매입은 일단락되는 듯했지만 본격적인 부지조성에 들어가면서는 부지 내 장애물 철거와 주민이주 문제가 대두되면서 종합제철건설사업은 다시 발목이 잡힌다.

종합제철 건설직전 동촌동 바닷가
2. 제철소 편입부지, 기름진 땅과 아름드리 소나무 숲도 많아

흔히 영일만의 기적의 터전으로 불리는 포항제철소는 사람이 거주할 수 없을 정도의 거센 모래바람과 척박한 모래벌 위에 세워진 것으로 표현되고 있으나 꼭 그런 것 만은 아니다. 실제로 포항제철소에 편입된 영일군 대송면의 북부지역 5개리(장흥·괴동·동촌·송내·송정)가운데 상당수 면적은 경지정리가 잘된 전형적인 논과 밭이었으며 문전옥답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마을이 조성된 곳이었다,

특히 대송면에서 가장 큰 부락이었던 동촌동에 300여 가구가 살았으며 제철소가 들어서면서 대부분 정들었던 고향 땅을 뒤로하고 포항 시내와 오천 등지로 뿔뿔이 이주해 갔다.

<포항제철 20년사>에도 은빛 백사장과 우거진 송림으로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고 있던 건설현장은 부지조성이 본격화되면서 황량한 벌판으로 바뀌어 갔다“고 적고 있을 정도로 제철소편입부지 가운데는 아름다운 소나무숲, 그리고 괴동동 일대에는 2천230여기에 달하는 대규모 공동묘지도 있었다.

□경북도, ‘애향심운동’·기채발행으로 제철소 부지매입 ‘성공’

경북도는 <애향심(愛鄕心)운동>이라는 캠페인까지 전개하면서 편입지주들에게 입지선정 이전의 가격으로 매수에 응해 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1967년7월 기적적으로 포항이 ‘종합제철소 입지’로 확정되자 경상북도는 이 기발한 운동을 고안해 즉각 실천에 들어간 것이다.

이한웅 논픽션·탐사 기록 작가
종합제철소가 들어서면 그로부터 얻을 이익이 많을 것이므로 애향심을 발휘해 땅값을 올리지 말자는 운동이었다. 이 때 경상북도는 국가산업(제철소 유치관련 땅값 안올리기)에 협조하는 가정에는 취업이나 주택단지 이주등을 道에서 적극 협조하겠다고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이 운동 초기에는 여기저기서 입지선정 이전의 땅값으로 매수에 응하겠다는 지주들이 나서기도 했지만 땅값은 지속적으로 올랐고, 이 같은 道의 운동(땅값 동결)에 반발하는 지주가 더 많아졌다. 당초 경북도의 취지와 달리 사태가 악화되자 김인 경상북도지사는 도지사를 대표로 하는 공업단지 조성본부를 포항에 설치했지만 350만평 가운데 사유지 300만평을 매입하기 위해 지주들을 설득하는데 는 상당한 진통을 겪었다.

그러나 경북도의 끈질긴 주민 설득과 현지 지역민들의 적극 협조로 용지매수를 위해 道가 10억 원 규모의 기채를 발행해가며 결국 1968년 8월에 이 매수한 부지를 포항제철소에 넘겨줄 수 있었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