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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성환 문경지역위원회 위원·문경사투리보존회장
그때는 왜 그리도 없었는지. 마음 놓고 돈 한 번 못 쓰고 여기까지 왔다. 아무 생각도 없이 그냥 공고가 좋다 해서 대구에 있는 공고로 갔다. 자취방을 얻는데 방 하나 쪽마루 밑 연탄아궁이에 밥 지어 먹을 수 있는 부엌 달린 것이 전세 20만 원이었다. 1977년 일이다.

그런 방을 맡아 놓고 집에 와서 어머니께 말씀을 드렸더니 어디서 구했는지 아무것도 없는 거 같았던 어머니는 전세 돈과 용돈까지 보태서 내 팬티에 양말 주머니를 달아 넣어주었다.

그 돈을 사타구니 알몸으로 감지하며 대구로 가는 길은 마음 든든했고, 자신만만했다. 잃어버릴 염려도 없어 2시간 반 기차 길은 여행같이 설레기까지 했다.

그 큰돈의 원천은 계(契)였다. 150여 호가 사는 솥골에는 그런 계를 잘 운영하던 아지매가 있었다. 우리와는 먼 친척의 며느리였다. 어머니의 시증 조모가 선산김씨였는데, 나에게는 고조할머니겠다. 그 아지매는 선산김씨네 며느리였다. 그 끈으로 하여 어머니와 그 집과는 아지매, 아지뱀, 흥님하면서 서로 가까이 지냈다.

그 아지매는 어머니처럼 키가 작았고, 또 어머니처럼 억척스럽고 약빨랐다. 키 크고 덩치 큰 사람의 기득권을 그 두 분은 아랑곳하지 않는 듯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어머니는 죽으나 사나 땅만 파서 생활을 했고, 그 아지매는 가게를 하면서 계주(오야·おや)를 많이 했다.

스물두 명을 모아 2년짜리 계를 주로 했다. 백만 원짜리면 모두가 월 5만 원씩을 내는데, 계주는 안 내고, 계원도 자기가 타는 달에 안 내기 때문에 24개월이 걸렸다. 첫 번째 달은 계주 몫이고, 그다음 달부터는 모두 모여 ‘지가리’ 하면서 심지를 뽑아 탈 사람을 정했다.

일자무식으로 오직 기억과 현장에서 그때그때의 셈으로만 경제생활을 했던 어머니는 중학생인 나를 ‘지가리’ 할 때면 같이 가자고 했다. 중학생으로 눈 좀 떴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어머니 생각에는 아마도 ‘내가 너만치만 배웠으면 신장대도 흔들겠다’는 믿음이 있었으리라.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그 자리에 그냥 앉아 있다가 집에 와서 어머니의 기억을 보조하는 역할이 다였으나 어머니에게는 든든했으리라.

아버지가 병으로 집안에 들어앉으신 지 10여 년이 되면서 어머니 혼자 6남매를 근사해야 했던 그때 살림살이는 밑 빠진 독이 따로 없었다. 큰누나, 작은누나 시집보내랴, 형님, 작은누나들 사회진출에 밑천 대주랴, 거기에 막내인 나마저 한 살림을 더 벌이게 됐으니, 어린 내 눈에도 그런 돈이 어디서 나랴 싶었다.

그런 위기에 솥골의 계는 한 줄기 동아줄이었다. 목돈이 필요한 시점에 서로의 신용을 밑천으로 십시일반 돈을 모아 한 사람씩 돌아가며 한 밑천씩 잡을 수 있게 했으니, 고만고만 살아가는 이웃들에게 그보다 더 큰 언덕이 어디 있으랴.

얼마 전에 열두 명이 1백1십만 원짜리 계를 모았다. 그 전처럼 금융 이자가 높은 시절이어서 이자 없이 순서를 정해 목돈을 마련하는 계로, 그 이름을 ‘행복업계’라 했다. ‘행복 UP契’란 뜻이다. 자주 모이는 사람끼리 재미삼아 결성한 것인데, 이름을 짓고 보니 제법 그럴듯했다. 아무리 돈이 가치 없는 시대라고 하지만, 현금 1백1십만 원이면 각자 이름 하나 지을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금액이다.

솥골과는 달리 대처인 점촌 시내에서는 계에 대한 사고도 많았고 계주가 계원들이 돈을 떼먹고 달아나는 바람에 덩달아 피해를 보기도 했지만, 자고 나면 얼굴을 마주 보고 사는 사람들이 사는 솥골에서는 그런 일은 없었다. 공동체 계와 돈놀이 계의 차이점이라고나 할까?

이해관계에 얽혀 치열한 우리의 삶에 그래도 아직은 곳곳에 전통공동체문화인 계가 성행하고 있다. 친목계, 상조계, 해외여행계, 반지계 등. 거기에는 이해타산보다 아직은 서로를 위해 상호부조의 뜻이 더 들어 있어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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