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분에 평창 동계 올림픽이 재미가 있습니다. 개막식부터 볼만했습니다. 특히 노가객 김남기 옹이 부른 정선아리랑은 가히 절창이었습니다. 예술은 영원하고 위대하다는 걸 실감했습니다. 그 절절한 한(恨)의 토로를 접하면서 애써 참아왔던 눈물샘이 툭 터져 버렸습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날 넘겨주소”라는 낯익은 가사가 그렇게 심금을 울릴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그동안 제가 즐겨 듣고 부르던 그 정선아리랑이 아니었습니다(저는 조용필의 정선아리랑을 즐겨 들었습니다). 그 노래 속에는 진짜 아리랑 고개가 없었습니다. 노가객의 정선아리랑을 듣고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진짜 정선아리랑에는 망국과 실향이 있고, 해방이 있고, 분단이 있고, 전쟁이 있고, 이산이 있고, 가난이 있고, 설움이 있고, 원망이 있고, 회한이 있고, 애타는 호소가 있었습니다. 올림픽이라는 무대가 그것을 한층 더 분명하게 해주는 것인지도 몰랐습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우리에겐 아직도 넘어야 할 아리랑 고개가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팔순의 노가객은 세계인들을 향해, 그렇게 울음을 삼키면서, 우리의 한(恨)을 전했습니다. 우리는 하나가 되고 싶습니다. 죽음을 넘어, 증오를 넘어, 동포애로 하나가 되고 싶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넘게 그냥 좀 두십시오, 제발. 제겐 그렇게 들렸습니다. 38따라지, 가난한 피난민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우여곡절과 파란만장의 성장기를 보낸 저로서는 참 가슴 벅찬 광경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남과 북이 다시 하나가 되자고 특사까지 내려와서 앉아있는 자리에서 듣는 노래니 그 감회가 유독 남다르지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요즘 재미나게 보는 게 하나 더 있습니다. 아동학대와 치유로서의 모성성(母性性)을 소재로 한 ‘마더’라는 드라마입니다. 보면서 반성이 많이 됩니다. 마땅하고 옳다는 생각으로 강행한 것들이 사실은 내 안의 분노와 불안, 그 못난 트라우마의 소치였음이 아프게 자각됩니다. 생각할수록 못나고 부질없는 소행들입니다. ‘핵 파는 처녀’와 같은 자극적인 표현도 행여 그런 ‘못나고 부질없는’ 것의 또 다른 얼굴이 아니기를 빕니다. 지금은 힘을 합쳐 아리랑 고개를 넘을 때입니다. 분노나 불안 같은 내 안의 복병들에게 속절없이 휘둘릴 때는 더더욱 아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