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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남북관계가 속도감 있게 화해 분위기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예측을 깬 급진전입니다. 여담입니다만, 북측 악단장을 두고 ‘핵 파는 처녀’ 운운했던 한 유력 신문의 칼럼이 우스운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글의 필자가 젊은 시절 한때의 동료이기도 해서 더 그런 느낌이 듭니다. 조금 더 사태의 추이를 보고 나서 촌평(寸評)을 날려도 될 것을 너무 성급했던 것 같습니다. 북측의 ‘꽃 파는 처녀’라는 혁명가극을 패러디해서, 북측 악단장의 미소 뒤에 감추고 있는 모종의 시간벌기 계략을 조심해야 할 것이라는 뜻으로 그런 명명(命名·이름붙이기)을 시도한 것 같은데 시의(時宜)와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민족애라는 가치와도 많이 어긋진 것 같고요. 물론 사람마다 생각은 다를 수도 있겠지요. 가급적 빠르고 편한 때, 우리 대통령을 평양에서 한번 뵙고 싶다는 북측 지도자의 뜻을 전한 김여정 특사를 두고 재차 그 비슷한 평가를 시도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현송월 단장은 일개 악단장(인민군 대좌 계급)이지만 김 특사는 북측에서 볼 때 한 국가의 정체성과 위상(位相)을 규정하는 특수 인격체(이른바 ‘백두혈통’)이기 때문에 위계나 위장의 수단으로는 결코 사용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얻는 것보다는 잃는 것이 훨씬 더 큰 경우가 됩니다. 그런 수단을 쓴다면 내외적으로 잃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대북관이 부정적이라고 해도 ‘핵 파는 처녀’와 같은 과격하고 선동적인 명명법으로 김 특사의 방남을 평가절하하는 일은 아마 없을 것 같습니다.

덕분에 평창 동계 올림픽이 재미가 있습니다. 개막식부터 볼만했습니다. 특히 노가객 김남기 옹이 부른 정선아리랑은 가히 절창이었습니다. 예술은 영원하고 위대하다는 걸 실감했습니다. 그 절절한 한(恨)의 토로를 접하면서 애써 참아왔던 눈물샘이 툭 터져 버렸습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날 넘겨주소”라는 낯익은 가사가 그렇게 심금을 울릴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그동안 제가 즐겨 듣고 부르던 그 정선아리랑이 아니었습니다(저는 조용필의 정선아리랑을 즐겨 들었습니다). 그 노래 속에는 진짜 아리랑 고개가 없었습니다. 노가객의 정선아리랑을 듣고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진짜 정선아리랑에는 망국과 실향이 있고, 해방이 있고, 분단이 있고, 전쟁이 있고, 이산이 있고, 가난이 있고, 설움이 있고, 원망이 있고, 회한이 있고, 애타는 호소가 있었습니다. 올림픽이라는 무대가 그것을 한층 더 분명하게 해주는 것인지도 몰랐습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우리에겐 아직도 넘어야 할 아리랑 고개가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팔순의 노가객은 세계인들을 향해, 그렇게 울음을 삼키면서, 우리의 한(恨)을 전했습니다. 우리는 하나가 되고 싶습니다. 죽음을 넘어, 증오를 넘어, 동포애로 하나가 되고 싶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넘게 그냥 좀 두십시오, 제발. 제겐 그렇게 들렸습니다. 38따라지, 가난한 피난민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우여곡절과 파란만장의 성장기를 보낸 저로서는 참 가슴 벅찬 광경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남과 북이 다시 하나가 되자고 특사까지 내려와서 앉아있는 자리에서 듣는 노래니 그 감회가 유독 남다르지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요즘 재미나게 보는 게 하나 더 있습니다. 아동학대와 치유로서의 모성성(母性性)을 소재로 한 ‘마더’라는 드라마입니다. 보면서 반성이 많이 됩니다. 마땅하고 옳다는 생각으로 강행한 것들이 사실은 내 안의 분노와 불안, 그 못난 트라우마의 소치였음이 아프게 자각됩니다. 생각할수록 못나고 부질없는 소행들입니다. ‘핵 파는 처녀’와 같은 자극적인 표현도 행여 그런 ‘못나고 부질없는’ 것의 또 다른 얼굴이 아니기를 빕니다. 지금은 힘을 합쳐 아리랑 고개를 넘을 때입니다. 분노나 불안 같은 내 안의 복병들에게 속절없이 휘둘릴 때는 더더욱 아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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