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제스는 마오쩌둥을 박살 낼 몇 번의 기회를 무산시켜 패배자가 됐다. 1934년 마오는 7만5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장제스 대군에 쫓겨 중국 서부의 황량한 산악지대로 달아났다. 이른바 대장정이었다. 장제스는 공산주의자들을 완전히 궤멸시키겠다는 각오로 마오 군대를 집요하게 추격했다. 몇 년 뒤 마오 군대는 1만 명도 남지 않았다. 추격이 계속되면 마오쩌둥 군대의 궤멸은 시간문제였다.

그러나 1937년 일본이 중국을 침입하자 이제 공산당의 군대는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장제스는 공산당 추적을 중단하고 일본군과 싸우는데 전력을 집중했다. 하지만 10년 뒤 마오쩌둥 군대는 장제스 군대와 대적할 만큼 전력이 회복됐다. 그 결과 장제스는 마오쩌둥에 쫓겨 본토 밖 대만으로 쫓겨난 신세가 됐다.

1840년 아편전쟁 이후 1049년까지 100여 년의 난리와 분열을 수습, 군벌 할거 시대를 정리한 장제스는 천하통일을 이룬 듯 했지만 국공내전 끝에 공산당보다 8배나 많은 군사력을 갖고도 패퇴했다.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은 베이징 성루에 서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외쳤다. 그 시각 마지막 일격을 가하기 위해 베이징 상공에 출격해 있던 장제스 공군기들이 갑자기 폭격도 않고 되돌아갔다.

텐안먼(天安門), 쯔진청(紫禁城) 등 문화유산의 보고인 고도 베이징을 차마 폭격할 수 없었던 장제스의 회항 결단 때문이었다. 훗날 장제스의 회항 결정을 두고 “큰일을 이룬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적을 박살 낼 수 있는 마지막 문턱을 넘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었다.

장제스의 패배는 적을 가볍게 보고 궤멸의 기회를 놓친 것이 후환이 됐다. ‘손자병법’을 열심히 읽은 마오는 ‘적은 완전히 박살 내라’는 손자의 전략을 철저히 지켰지만 장제스는 너그러웠던 것이다. “사람은 작은 피해를 당하면 복수를 하지만 큰 피해를 당하면 복수도 하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가 사람에게 주는 피해는 복수를 걱정하지 않을 정도가 돼야 한다” 마키아벨리의 독설이다. 집권세력이 전 정권까지 파헤치면서 보수진영 궤멸전을 펼치고 있는 것은 ‘20년 집권론’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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