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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소설가
보통은 일주일간 이런저런 생각들을 묵혀서 한 편의 칼럼을 씁니다. 200자 원고지 10장 이내로 할 말을 다해야 합니다. 조리 있게 기승전결도 맞추어야 하고 독자들의 읽는 재미(감동)를 위해 가능하면 ‘발견의 기쁨’과 극적 반전의 묘(妙)도 추구해야 합니다. 언젠가 두 개의 지면에 동시에 칼럼을 연재할 때가 있었습니다. 제 평생에 그처럼 고통스런 글쓰기가 없었습니다. 제 못난 재주로는 ‘1 칼럼 1 발견’의 글쓰기 원칙을 지키는데 일주일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닙니다. 최근 몇 년간 200편에 가까운 칼럼을 써왔는데 그럭저럭 이라도 제 마음에 드는 것은 그 절반도 안 됩니다. 세어 보지는 안 했지만 아마 3~40편 정도가 조금이나마 만족감을 선사하는 ‘자식 같은 글’에 들 것입니다. 그런 상황이니 일주일에 두 가지 생각을 해야 되는 게 참 어려웠습니다. 일 년 반 동안 한 달에 한 번씩 ‘2 칼럼 2 발견’을 해야 했는데 당연히 두 글쓰기 다 시원찮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쪽 신문에서 연재 기한이 다 되었다는 통보가 왔을 때 정말 기뻤습니다. 속으로 크게 만세를 불렀습니다.

‘내부자들2’라는 제목을 내걸어놓고 느림보 글쓰기론을 장황하게 늘어놓은 것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아시다시피 영화 ‘내부자들’은 권력 핵심의 비리와 비행을 내부자(를 가장한 자)가 고발하는 이야기입니다. 내부자가 아니면 고발할 수 없는 것이 ‘권력관계 비리’라는 것, 그리고 어떤 ‘고발’도 자기희생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 영화는 실감 나게 전달합니다. 그 영화 제목을 빌려온 것은 지금 전 세계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미투(Me Too·나도 고발한다)운동도 결국은 내부자들의 문제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수년 전 한 쓰라린 사례를 가까이서 본 적이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죽겠다고 아우성치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꿀 먹은 벙어리였습니다. 저도 벙어리들 중의 일인이었습니다. 생각할 때마다 얼굴이 뜨거워집니다. 사실 그 이야기를 포함해서 ‘자부와 수치’라는 제목으로 제 주변에서 전해 들은 못된 성차별(착취), 성갑질(희롱, 추행), 악성 풍기문란(간접 성폭력) 등에 관해서 쓰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 글을 다 쓰고 나니 이른바 ‘사회적 관계’가 크게 염려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저에게 닥칠 여러 불편한 일들이 생각났습니다. 그것이 조금 진정되니까 이제는 이야기를 전해준 이와 피해 당사자들의 입장이 염려가 되었습니다. 만약 제가 쓴 글이 본의 아니게 선의의 제3자에게 고통이나 2차 피해를 주는 것이 되어서는 절대 안 될 일이었습니다. 당사자들의 의지와 별개로 제가 나설 일이 아니었습니다. 저와는 달리 그들은 아직 젊고 앞으로 많은 사회활동을 해야 될 사람들입니다. 저같이 살 만큼 살고, 거의 두문불출하며 지내는 자와는 많이 다른 입장들입니다. 그들의 세상은 아직 약자가 마음 놓고 고발을 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닙니다. 마땅하고 옳은 일이라고 해서 내 기분, 내 이념대로 마구 밀어붙일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애써 쓴 글을 버리기로 했습니다. 다만 마지막 구절은 살려서 인용합니다.

“그들보다 더 저를 괴롭힌 자들은 그런 야수(野獸)들에게 의탁하거나 구걸해서 작은 이득을 구하려고 전전긍긍하는 다수의 침묵자들이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야수의 협박과 회유에 못 이겨서(못 이기는 척) 대놓고 앞장서서 그들의 이익과 만행을 옹호한 자들도 있었습니다. 제가 두고 본 결과는 참담합니다. 항상 그런 침묵자들이 높은 자리로 올라갑니다. 그게 현실입니다. 미투운동을 바라보며 씁쓸한 기분이 드는 걸 막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쪼록 미투운동이 문화, 정신혁명으로 승화되어 우리 사회를 근본적으로 쇄신해 주기를 바랍니다. 야욕에 사로잡힌 철면피 짐승들이 사라지고 자부와 수치를 아는 밝은 세상이 꼭 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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