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심시녀회 수녀원 큰 양보·이성수 의원 솔선수범···선열들의 희생 철강신화 밑거름 되다
포항제철주식회사가 정식 설립되기 전, 1967년 하반기부터 편입지역에 대한 매수가 일단락되고 본격적인 부지조성에 들어갔지만 이번에는 부지 내 지장물 철거와 주민이주 문제가 대두되면서 발목이 잡혔다.
제철소에 편입되는 부지는 경북 영일군 대송면과 오천면 일부로서 형산강과 냉천 사이의 영일만에 인접해 있었다. 이 지역에 거주하던 주민들은 대부분 농업과 어업을 생업으로 하고 있었다.
당시 편입지역 내에는 대송면에서 가장 큰 부락이었던 동촌동에 300여 가구가 살았고, 지금의 제3고로가 들어선 곳에는 부지 18만평, 건평 4천 평으로 당시 동양최대 규모를 자랑하던 예수성심수녀회 수녀원과 송정동이 자리잡고 있었다. 수녀원부지는 당초 일제시대때 일본육군의 주둔지였고 광복이후 동지중학교가 2년 정도 점유했던 곳으로 솔밭사이에 터를 잡은 명당이었다.
그리고 현재 포항시내로부터 형산다리를 건너 강변도로로 들어가는 입구, 송내동에도 가옥 등 철거대상 지장물이 총 533건에 달했다.
보상과 협상, 철거와 이주, 이러한 과정에서 에피소드도,안타까운 사연도 많았다.
당시 영일군청 공무원으로 부지매입 및 토지보상, 주민이주 업무를 일선에서 맡았던 이석수 前경상북도 정무부지사는 “단군이래 최대의 산업시설을 고향에 유치한다는 기쁨 때문에 격무에도 영일군 택지조성사업 조례 입안등 많은 업무를 처리했지만 정든 고향마을을 내놓고 떠나야 하는 주민을 접하고, 토지보상에 따른 민원이 폭주할때는 어려움도 많았다”고 했다. 그는 “강제철거에 나서자 일부주민들은 불도저 앞에 드러누웠고 몇몇 어르신들은 조상대대로 살아온 고향을 떠날 수 없다며 안방에 앉아 끝까지 저항하기도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예수성심시녀회 수녀원은 지금의 제철소 코크스공장과 3고로 위치에 있었다.
처음에는 신부 2명과 수녀 180여 명을 비롯하여 노인, 고아, 일반 직원 등 모두 700여명의 가족을 거느린 수녀원 측의 저항이 특히 강했다. 이들은 청와대까지 찾아가 토지수용대상에서 제외시켜 줄 것을 요구 했다. 이 일은 사안이 워낙 민감해 박태준 사장도 직접 나서 프랑스 출신의 길수다니 지도신부와 박마리요왕 총장수녀를 찾아가 제철소건설을 위해서는 수녀원을 철거하지 않을 수 없다고 호소했다.
끈질긴 설득 끝에 마침내 수녀원 측도 정부입장을 받아들여 처음에 반대하던 길수다니 신부가 손수 다이너마이트로 수녀원 건물을 폭파하고 쓸 만한 벽돌을 챙겨 1961년1월, 지금의 대잠동으로 옮겨갔다.
이처럼 수녀원이 자진해서 철거에 협조하자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주민들도 반대의 기세를 크게 낮추면서 부지조성은 큰 산을 넘었다.
수녀원과 함께 부지정리의 큰 걸림돌은 바로 송동,괴동동 일대 솔밭에 흩어져 있던 분묘였다. 특히 제철소가 들어설 부지안 분묘만도 무려 3510기에 이르렀으며 이 가운데 무연고 분묘를 제외한 후손이 있는 분묘만 2280기에 달해 이전과 설득에 상당한 진통과 시간이 소요되었다.
이 문제는 당시 제7대 민주공화당 국회의원인 이성수의원이 앞장서면서 실마리가 풀렸다. 이의원은 국가사업에 적극 협조해야 한다며 철거지역에 있던 부친의 묘를 인근 대각리로 자진해서 옮겼다.
후일 이의원의 수행비서를 했던 공원식 경상북도 정무부지사는 “국회의원으로서 당연히 정부사업에 적극 협조해야 하기에 내가 문중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총대를 매겠다며 앞장서 선친의 묘를 옮긴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5.16혁명후 김종필씨와 서울대 사범대 동문의 인연으로 전국구의원이 되었던 이의원은 그 후 11대 국회때 다시 입성, 박태준씨가 위원장을 맡고있던 재무분과위원회 국민당 간사를 맡아 임기 중에 포항제철의 관세율인하, 출자사인 삼화화성(지금의 포스코켐텍) 의 공장부지 매립 민원등을 처리하며 포항과 포스코에 큰 도움을 주었다.
이의원은 이밖에도 포철공고 전신 공립 포항공고 설립에 결정적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이병철 삼성그룹회장의 요청으로 삼성계열사 (주)제일기획을 1973년에 설립하고 초대 대표이사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