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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소설가
학벌 좋고 머리 좋아 성공한 사람들이 흔히 보이는 태도 중의 하나가 ‘몰윤리적 입장’입니다. “윤리? 시시하게 왜 그런 것을 따지지? 그것 말고도 중요한 게 얼마나 많은데” 그들 중 상당수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그들은 ‘윤리’ 위에서 놀고자 합니다. 법과 제도 위에 군림하고 스스로를 ‘규칙을 만드는 자’로 자처하고 싶어 합니다. 언젠가 제가 이 지면에서 독서의 세 등급을 매기면서, ‘처세를 배우는 독서’, ‘진리를 찾는 독서’, ‘윤리를 구하는 독서’ 중에서 가장 상위에 놓이는 것이 ‘윤리를 구하는 독서’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저와 달리 ‘진리를 찾는 독서’를 가장 높이 칩니다. 그들만 알고 남들은 모르는 게 있다는 사실이 그들에게는 큰 자부가 됩니다.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질문은 “많이 안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런데 그렇게 많이 알아서 뭐할 건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퀴벌레를 싫어하는 것만큼이나 그런 질문을 그들은 싫어합니다. 그런 질문을 봉쇄하기 위해서 일단 겉으로는 “진리 그 자체가 인간을 구원한다”라는 말을 철저히 신봉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다만. 모르는 자들을 하등의 인간으로 취급하는 일에 대해서는 특별히 가식을 꾸미지 않습니다. 대놓고 그들을 무시합니다. 차별을 통해 자신의 우월함을 안팎으로 확인받고자 합니다. 그들은 그들 ‘인간’과 인간은 아니지만 ‘인간과 꽤 비슷한 것들’이 있는 게 세상이라고 믿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들 ‘우월한 인간들’들도 곤경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지배와 피지배의 입장에 심각한 전도(顚倒)가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재수 없으면 자신들의 영토 안에서 영어(囹圄)의 몸이 되거나 지탄받는 사회악으로 지목되어 사회와 영원히 격리될 수도 있습니다. 수갑을 차고 포승줄에 묶여서 법정을 드나드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하루아침에 패륜아로 낙인 찍혀 그동안의 영예가 물거품이 되는 신세가 되기도 합니다. 그때 그들이 자주 사용하는 말이 박해(迫害·힘이나 권력 따위로 약한 처지의 사람을 못살게 굴거나 해를 입힘)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천부적인 우월성으로 정당하게 획득된 자신들의 특권이 사회적 여건 변화로 일거에 박탈되는 것을 박해로 여깁니다. 자신과 적대적인 관계에 놓인 사람이 권력과 여론을 이용해 자신에게 보복을 하는 것이라 여깁니다. 겉으로는 반성하는 포즈를 취해도 내심으로는 수긍하지 못합니다. 자기의 과오를 ‘인간이어서 범할 수밖에 없는 한계’로 치부하고 자신을 벌하고자 하는 모든 사회적 관계를 박해로 해석합니다. 그들은 그래서 구원받지 못합니다.

어려서는 몰랐는데, 나이 들면서 알게 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세상의 진정한 ‘박해’ 중에는 그 어떤 것도 자초(自招)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초하지 않은 ‘박해’는 진정한 그것이 아닙니다. 어려서 신약성경을 꼼꼼하게 읽을 적이 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방학숙제로 영어책 하나를 번역(단어장 만들기)하는 게 있었는데 그때 제 손에 잡힌 것이 그 책입니다. 특별한 감동(종교적 구원)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었던 탓에 그 책은 의문만 남겼습니다. 자기를 따르면 박해받을 것이라는 걸 미리 백일천하에 고지하면서 추종자를 모집하는 아주 희귀한 경우가 ‘예수 이야기’였습니다. 어린 저에게 예수의 ‘설득’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가 약속한 것은 ‘구원’이나 ‘영생’과 같은 ‘보이지 않는 미래의 보상’뿐이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무엇이 ‘제자들의 믿음’을 가능케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는 분명했습니다. ‘예수 이야기’가 ‘박해’를 부르는 이야기였다는 것, 그것 하나는 분명했습니다. 그렇게 ‘박해’를 자초하고 그것을 넘어서려는 인간, 그 인간이 제게는 너무나 불가사의한 존재였습니다.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왜 ‘자초하는 박해’만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 수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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