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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정대 변호사

폴 오스터의 자전적 이야기인 ‘겨울 일기’에는 작가가 살았던 21곳의 집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그가 태어난 뉴저지의 벽돌 아파트부터 어린 시절을 보낸 집들, 컬럼비아 대학교 기숙사, 젊은 시절 맨해튼 웨스트의 아파트들, 파리의 월세 집과 프로방스의 농가가 등장한다.

폴 오스터는 맨해튼에서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던 여자 친구와 결혼하지만 겨우 4년을 버틴 후 파경을 맞는다. 그는 그 시기를 보낸 집에 대해 “당신은 귀신 붙은 집 따위는 믿지 않지만 이제 와서 그 당시를 돌아보면 악마의 주문에 걸려서 살았던 것 같다. 당신에게 닥친 온갖 어려움에 집 자체가 어느 정도는 책임이 있는 것 같았다.”라고 털어놓는다.

그는 이후 여기저기 집을 옮겨 다니며 정서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낸다. 그러나 폐허에서 꽃이 피듯이 절망 속에서 현재의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몇몇 집들을 더 거쳐 마침내 브루클린의 지은 지 백 년이 넘은 4층짜리 주택을 구해 정착한다.

그는 오래된 그 집을 사랑한다. 20년 가까이 조금씩 꾸준히 구석구석 고쳐서 초라하고 낡은 집을 반짝이는 아름다운 집으로 바꾼다. 그 집은 가장 오래 산 집, 가장 애착이 가는 집, 걸어 들어갈 때마다 기쁨을 느끼는 집이 되었다.

집도 삶의 일부분이다. 삶이 변하듯이 집도 바뀐다. 성장과 변화의 시기에는 집도 자주, 많이 바뀐다. 장년과 노년을 거치면서 삶이 자연스럽게 머무는 것처럼 집도 더 이상 바뀌지 않게 된다. 세상은 바뀌는 부분도 있어야 하지만 바뀌지 않는 부분도 있어야 한다. 새로운 공간은 새로운 모습을 띤다. 그러나 이미 다듬어져 안정된 형태를 이룬 공간은 정착한 삶처럼 그대로 두는 것이 자연스럽다.

나는 20년 동안 내 집과 사무실 주변에 바뀌면서 나무들이 사라지고 정겨운 골목과 단독 주택들과 마당이 있는 식당들이 헐리고 그 자리에 고층 아파트들이 들어서는 것을 목격해야 했다. 바뀌지 않았으면 더 정겹고 좋았을 곳들이었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공간을 재개발, 재건축, 도시재생 등의 이유로 너무 쉽게 뜯거나 헐어버린다. 아직도 살만한 집을 헐고 더 나은 더 높은 집을 짓는 일에 몰두한다. 새 건물들로 재산 가치는 늘어날지는 모르지만, 과거의 삶의 흔적들이 사라진다. 이 나라에서는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는 왜 이렇게 그대로 놔두지 못할까? 우리 삶을, 추억을, 공간을 그렇게 쉽게 허물고 바꿔도 되는 것일까? 아직도 살만한 집을, 살만한 공간을, 애착이 가득한 오랜 집을, 주변의 길과 나무들을 쉽게 허물고 뽑고 바꾸는 일은 이제 멈추어야 하지 않을까?

정부의 부동산 규제로 서울 강남 아파트 분양에 로또 광풍이 불고 있다. 분양에 당첨되기만 하면 수억을 챙길 수 있다고 한다. 정부는 사람들이 몰리지 않게 대출을 받지 못하도록 했지만, 사람들이 몰리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어쨌든 9억 원 이상의 아파트를 현금으로 구매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로또 아파트에 당첨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됐다. 현금 자산가들에게는 엄청난 행운인지 몰라도 그렇지 못한 국민으로서는 화나는 일이다. 문재인 정부는 강남 3구 외 서울 전 지역뿐만 아니라 대구 수성구도 투기과열지구로 지정하고 있다. 대출규제로 현금 부자들을 위한 불평등을 낳기보다는 입법으로 재개발, 재건축, 도시계획 등의 건축허가 조건을 강화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한다.


*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윤정대 변호사
서선미 기자 meeyane@kyongbuk.com

인터넷경북일보 속보 담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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