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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소설가

우리가 ‘정보를 얻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밖에서 얻는 것과 안에서 얻는 것이 그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맹자’ 서두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양혜왕이 맹자를 불러 ‘한 말씀’ 듣고자 했습니다. 왕이 말했습니다. “노인께서 천 리를 멀다 않고 오셨으니 우리나라를 이롭게 하여 주시겠지요” 양혜왕이 말한 이(利)는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군대를 강하게 하는 부국강병의 방책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맹자는 딴청을 피웁니다. “왕은 하필 이(利)를 말씀하십니까? 인의(仁義)가 있을 뿐입니다” 무엇보다도 중한 것이 군주의 인품을 갖추는 일이라는 말이었습니다. 군주의 자격도 갖추지 못한 자가 어떻게 부국강병을 도모할 수 있겠느냐는 일말의 꾸지람도 겸하는 말이었습니다. 양혜왕은 예를 갖추어 맹자를 맞이했습니다만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너 자신을 알아라”, “부단히 자기 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밖에서만 정보를 구하는 자는 늘 실패한다”라는 쓴소리 뿐이었습니다.

‘정보를 나누는 방식’에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특정 이해집단 안에서만 독점적, 배타적으로 공유하는 스타일이 있고 무차별적으로 너나없이 공유하는 스타일이 있습니다. 일례로,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것은 ‘정보를 나누는 방식’에 획기적인 변화를 주는 일이었습니다. 양반 사대부들에게만 허용된 문식력(文識力·글을 읽고 쓰는 능력)을 일반 대중들에게도 골고루 나누어주는 일대 혁신이었습니다. 문자 속이 없어도 누구나 익힐 수 있는 소리글자를 만들어 서로 정보를 나눌 수 있도록 해서 필요한 여론도 만들고 필요한 지식도 구하게 한 것입니다. 흔히 하는 말 중에 ‘정보의 독점’이 전문가 그룹을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정보의 내용뿐만 아니라 정보가 유통되는 방식(담론)까지 배타적으로 운용해서 자기들만의 이익을 효과적으로 취합니다. 지금도 학계나 의료계 법조계 등의 상황을 보면 일견 수긍이 되는 주장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는 작금의 SNS와도 같은 사회적 의의를 지니는 일이었습니다. 정보유통과 여론형성의 패러다임에 근본적인 변화를 부르는 큰 사건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정보를 표현하는 방식’의 두 가지 패턴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의 글 제목인 ‘정치가의 실어증’과도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말을 하거나 글을 써서 정보를 표현하는 데에는 두 가지 능력이 요구됩니다. 은유 능력(유사성 인식)과 환유 능력(인접성 인식)이 그것입니다. 그것들에 문제가 생기면 실어증 증세가 옵니다. 이를테면 ‘신데렐라’를 읽고 그 내용을 설명하면서 “가난하고... 마루를 닦다가... 깨끗하게... 가난하고... 언니와 엄마... 무도회, 무도회에서 왕자... 신발...”이라고 ‘전보식 문장’으로 말한다면 그는 환유 능력(문법능력)에 심각한 장애가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것을 두고 브로카 실어증이라고 부릅니다. 그 반대로 ‘정치인의 말’이라고도 불리는 실어증이 있습니다. 동어반복을 일삼으면서도 본인 스스로는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베르니케 실어증’이 그것입니다. 은유 능력(연상능력)에 심각한 장애가 생겨서 본인 스스로 어떤 견해나 주의(主義)를 표방하는 단어를 선택하지 못하고 여기저기서 갖다 주는 틀에 박힌 것만 씁니다. 요즘 TV에서 유명 정치가들의 말을 자주 듣습니다. 주로 미투운동과 관련되어서입니다. 그런데 한결같이 그들 모두가 베르니케 실어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기 단어는 없고 상투적인 동어반복만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오히려 브로카 실어증을 보여주는 게 맞을 것 같은데 상황은 정반대입니다. ‘안으로부터 얻는 정보’는 없고 밖에서 찾은 정보만 천편일률 갖다 씁니다. 천만다행입니다. 이제라도 그런 ‘이(利)만 찾는’ 실어증 환자들이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꼴을 보지 않을 수 있게 돼서요.


*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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