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직이 28살 때 어느 날 밤 꿈을 꾸었다. 꿈에 의제가 나타나 항우에게 자신이 시해당해 강물에 수장됐음을 하소연하는 꿈이었다. 다음날 아침 김종직은 지난밤 꿈을 회상하며 초나라 의제를 추모하는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섰다. 그 후 김종직은 대과에 급제, 사림파의 리더로 활약하다 62세로 임종했다.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즉위, 성종실록을 편찬하던 중 훈구파인 이극돈이 성종시대 관리들의 사초(史草)를 정리하다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발견했다.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사관으로 있을 때 스승의 글을 사초에 올리면서 전라감사로 있던 이극돈이 세조의 비 정의왕후의 상중인데도 기생들과 놀아났다는 내용도 곁들여 적었다. 그 때문에 김일손과 앙숙이던 이극돈은 ‘조의제문’을 들고 사림파와 적대관계였던 유자광을 찾아갔다.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있을 때 유자광이 쓴 현판을 보고 간신의 글이라며 불살라 버린 데 대해 앙심을 품고 있던 유자광은 ‘조의제문’을 이용, 사림파를 제거하기로 했다.

‘조의제문’의 의제는 단종이며 항우는 수양을 뜻한다며 세조를 비난하고 단종을 추모하는 불온문서라고 연산군에 모함했다. 연산군은 김종직의 시신을 부관참시한 후 김일손 등 사림파 선비들을 무더기로 능지처참했다. 당대의 명유(名儒) 60여 명이 목숨을 잃고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무오사화’다. 이 사화 이후 한동안 서당에 글 읽는 소리가 끊겼고, 길거리에는 선비 차림의 행인이 사라졌다. 연산의 폭정은 더한층 심화됐고, 권신들은 자기들 이익 챙기기에 혈안이 됐다.

무오사화에 이어 일어난 ‘갑자사화’는 더 처참했다. 연산군의 친모인 폐비 윤씨의 피 묻은 원삼 자락을 본 연산군은 분기탱천 폐비 윤씨 사건에 관련된 자들과 방관자들을 색출, 살육의 복수전을 벌였다. 무려 7개월 간 벌어진 복수전으로 대간과 시종 가운데 살아남은 자가 없을 정도였다. 두 사화가 나라 안 인재의 씨를 말렸다고 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계속되는 적폐청산 정국으로 전직 대통령을 비롯, 수많은 전 정권 공직자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체포, 소환조사, 구속이 이어지고 있다. 적절한 수위 조절이 필요한 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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