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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소설가

공자님이 인물평을 했습니다. 이른바 사회지도자 분류법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공자님이 가장 바람직한 지도급 인물로 생각한 것은 군자(君子)입니다. 군자불기(君子不器·하나의 그릇으로 한정되지 않는 자목적적인 존재)라는 말로 사회적 존재로서의 보통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가 군자임을 밝혔습니다. 대인(大人)이나 성인(聖人)은 아무래도 좀 특별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군자급 인물도 흔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차선책으로 광자(狂者)와 견자(?者)도 꼽았습니다. 그들 정도라면 군자가 아니더라도 함께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광자는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이념적 인물입니다. 그의 전매특허는 ‘(옳았던) 옛사람이여 옛사람이여’라는 말입니다. 입만 열면 공평무사(公平無私)와 도덕적 실천을 강조합니다. 다만 그 스스로는 말과 행실에 약간의 괴리가 있습니다. 그 점이 군자와 다릅니다. 시쳇말로 옮기자면 ‘386운동권’ 일부나 ‘강남 좌파’쯤 될 것 같습니다.

견자는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인물입니다. 자신을 희생해서 사회정의를 구현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불의와 타협하지도 않는 인물입니다. 남 앞에 잘 나서려고도 하지 않습니다만 제 앞가림은 하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광자 다음으로 함께 할 인물로 대접받습니다. 굳이 요즘 말로 옮기자면 ‘합리적 진보’, ‘개혁적 보수’ 등이 그들의 정체성과 근사하다고 할 것입니다.

공자님이 가장 나쁜 인물 유형으로 본 것이 향원입니다. 그는 자신의 주거지에서는 주위로부터 ‘점잖은 인물’로 평가될 때도 있지만, 하루도 거르지 않고 늘 ‘나에게 어떤 좋은 일이 생길까’만 궁리하는 사람입니다. 공자님은 이런 유형의 인물을 ‘덕을 해치는 자’라고 힐난했습니다. 그들이 일삼는 것은 ‘광견’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좋은 말’만 앞세우고 백성들의 삶을 걱정하지는 않는다고 흠을 잡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다 자신의 욕심을 옹호하고 세상의 눈을 가리기 위한 짓이라는 것이 공자님의 생각이었습니다. “(광견은) 왜 저렇게 잘난 척하는가? 말은 행실을 외면하고, 행실은 말을 외면하는데도 입을 열었다 하면 옛사람이여, 옛사람이여 하는가. 어찌 혼자서만 도도하게 살아가는고?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이 세상일을 하여 (나만) 잘 되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 하면서 자신은 가만히(음흉하게) 세상에 아첨하는 자가 바로 향원이다. 내 문 앞을 지나면서 내 집에 들어오지 않더라도 내가 유감스러워하지 않을 자는 바로 향원이다. 향원은 덕(德)을 해치는 자이다”라고 공자님은 말했습니다(‘맹자’, 진심장구). 요즘 매스컴을 통해 자주 접하는 ‘벌 받는 몹쓸 기득권층’의 모습에서 그들의 잔영을 봅니다.

군자, 광자, 견자, 향원. 공자님의 네 가지 인물 분류법을 보면서 인생살이가 별것 없다는 생각을 또 하게 됩니다. 2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눈앞에 보이는 ‘사람 모양(꼴)’이 하나 변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군자도 엄연하고 광견과 향원도 여전합니다. 향원인 주제에 군자연하며, 광견들이 득세하면 ‘나라가 불안해진다’라고 떠드는 것도 똑같습니다. 그것을 보면 우리 정치판이나 여론 시장이 아직도 봉건주의적 사고나 행태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듭니다. 그래서 드는 생각입니다. 개헌이 발의되었습니다. 이런저런 말이 많습니다. 하나는 분명합니다. 군자 대통령을 뽑을 수 있는 길을 막아서는 안 됩니다. 내각제 요소는 아직은 시기상조입니다. 광견과 향원들이 자기들 뜻대로 나라를 좌지우지할 수 있도록 방치하면 큰일 납니다. 군자 대통령이 광견들과 함께하는 것까지만 허용해야 합니다. 공자님의 말씀은 예나 제나 하나 틀린 것이 없습니다. 국민이 눈을 부릅뜨고 감시해야 할 때입니다.


*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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