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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성무 수필가·김천가메실경로당 회장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밥 지을 쌀을 떠내주면서 쌀독에 드르륵하며 들리는 소리를 듣고 쌀독 안을 들여다본다. 아껴서 먹어도 쌀이 잘 줄어드는 것을 무심히 보지 않고 걱정하는 눈치다.

시어머니께서 내어주시는 쌀을 들고 “오늘 저녁은 무엇을 할까요?”하고 물어본다.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 삼 대가 같이 사는 대가족이 내어주는 쌀 가지고는 밥을 짓기에는 부족하기에 물어보는 것이다. 시어머니는 “저녁이라서 콩나물밥을 해야 온 식구가 먹지 않겠니?” 하신다. 시어머니와 같이 살지 않는 지금이야 밥 지을 쌀을 시어머니가 내어주고 지어 놓는 밥도 시어머니께서 주걱을 들고 퍼주는 그때의 상황은 설명하지 않으면 이해가 안 갈 것이다.

1950년에서 1960년 초반까지는 대가족이기 때문에 정지(부엌)에서 별채에 계시는 할아버지 밥상까지 셋이나 네 개의 상을 차리고 그것도 겸상으로 차려서 드리고 정지에는 동서나 삼동서가 상이 나오면 어른들 상에서 남은 밥을 모아서 바가지에 비벼서 동서들끼리 같이 먹는다. 시어머니께서 밥주걱을 드는 것은 어른들 밥부터 챙기기 위한 것이고 밥쌀을 내주는 것도 쌀을 아껴야 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는 아침밥을 절반만 잡수시고 상을 내놓는다. 어머니는 짐작으로 알고 계신다. 오늘 누구네 집 회갑 잔치인데 초대를 받아서 거기 가셔서 잡수신다고 정지꾼 먹으라고 일부러 밥을 남기신 것이다. 이 갸륵한 마음을 감히 알 지어다!

옛날 소금장수들이 도비장수를 하다 한데 모여서 숙식을 같이하는데 식사를 마치고 숭늉을 가져다 놓으면 서로 먼저 먹으라고 권한다. 왜냐하면, 앞에 물을 먹고 나면 가라앉은 숭늉 찌꺼기를 먹고 배를 채워야 하기 때문이다. 이 또한 얼마나 애절한 일인가!

동지섣달 긴긴밤에 식량 곤란으로 저녁에 나물죽을 먹고 잤는데 배에서 꼬르륵꼬르륵 소리를 들으면서 억지로 잠이 들었다.

자다가 잠결에 숟가락 소리가 나서 귀를 기울이니 큰집에서 가져온 제삿밥을 아버지, 어머니께서 잡수시는 소리를 들으면서 이제나저제나 일어나서 같이 먹자고 깨울까? 하고 기다리다가 빈 그릇 소리가 날 때는 눈물이 핑 돌았다.

여름 방과 후 소 꼴 뜯으러 갈 때는 논매는 들로 가서 새참 먹는 제방 둑으로 일부러 지나가면 이웃 아주머니가 “얘야 여기 밥 먹고 가라”고 하며 물 묻은 숟가락을 손때 묻은 앞치마에 싹싹 닦아 주면서 권할 적에는 기다렸다는 듯이 주저앉아 반가운 마음으로 샛밥을 먹기도 한 아득한 그 시절이지만 평생 잊지 못한 비연의 추억이다.

농사일할 때에는 배가 고파서 허기진 배를 졸라매다 못해 물 한 사발에 간장을 타서 먹기도 하고 들에서 재배하는 풋녹두, 양대, 목하다래 등으로 허기를 면하기도 했다.

잔칫집에서 힛집이라고 해서 시래기와 가루 찐 것을 내놓으면 단숨에 들통이 나고 대문 앞에서 떡 부스러기라도 얻어먹으려고 코를 훔쳐가면서 서 있는 것은 참으로 애처로웠다.

학교운동회 때는 고작 가지고 가는 것이 감과 삶은 고구마, 밤, 땅콩이고 돼짓국 물에 둥둥 띄운 비개국물이라도 한 사발 얻어먹으려고 줄을 선다.

땅이 없어 소작하는 농민들은 초봄에 부잣집에 품삯으로 마리 양식을 갖다먹고 온 여름에 일로 갚느라고 등에 물 마를 날이 없다. 심지어 필자가 어느 문헌에 보니 손자가 쌀을 많이 먹고 싶어서 보채는 것을 보다 못해 느닷없이 부잣집에 들어가서 쌀을 훔치다가 들켜서 두들겨 맞아 죽었다는 믿지 못할 사실도 있다 한다.

이 모든 이야기가 식량난으로 아껴가며 죽지 못해 살아왔던 배고픈 푸념이고 하소연이다.

1930년에서 1950년대에는 너나없이 특히 농촌에서 먹을 것이 없어서 입에 풀칠로 연명하고 보릿고개를 체험한 처절한 삶일 진데 쌀이 천대받는 현실(現實)과는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가수 ‘진성’의 보릿고개 가사는 그 시대상을 잘 관조하고 있다.

당시의 농사는 가뭄으로 흉년이 계속되었고 가뭄대책은 고작 냇가에 보를 막아서 ‘수멍’으로 물을 대고, 냇물이 떨어지면 웅덩이 물을 물고리로 펴 올려서 대주다가 웅덩이 물이 바닥이 나면 천수답에는 비를 기다리다가 모내기 시한이 지나면 부득이 서숙(조)나 메밀을 대파했다.

진성갈력하여 겨우 생산한 식량은 소작료를 주고 장리곡은 추수하여 갚기로 하고 밀 빌리는 벼 이자 50%를 갚고 세금과 가계 비용으로 쓰고 나면 남은 식량은 초여름 보리수확 때까지 버티기에는 절대 부족했다.

일상의 식사라고는 부잣집들은 아침 식사는 잡곡위에 ‘웁쌀’을 얹어서 밥을 지은 후에 먼저 어른 밥상에 올리고, 점심 저녁은 나물죽과 밑거름으로 배급받은 뿌옇게 뜬 콩깻묵을 쌀에 섞어 밥도 짓고 심지어는 전단토(田丹土)라 하여 회찰흙을 죽에 섞어 먹기도 했다는 믿지 못할 기록도 있다.

이때에 아이들도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며 진달래꽃, 찔레꽃 줄기와 삐삐풀로 배고픔을 달랬고 어른들은 풀뿌리나 소나무 껍질로 입에 풀칠하면서 연명했던 것이 생활이 아니라 처참한 생존이었다.

이렇게 춘궁기에는 초근목피로 연명하니 부황증(浮黃症)으로 오래 굶어서 살가죽이 들떠서 누렇게 되었으며, 산모는 낙태까지 했다고 한다.숟가락 수를 줄이기 위해 자식 낳아서 열 살만 되면 여식애는 남의 집에 부엌살이로 보내고 남자애는 남의 집 꼴머슴으로 보내서 나중에는 기아(飢餓)가 기아(棄兒)가 되어 생이별로 자식을 가슴에 담고 사는 가정도 있다.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끝내는 걸인이 되어 만주로 떠나 유량민 신세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필자는 유년시절에 들은 기억이 난다.



가난의 반대급부가 가져다 준 미담을 소개하면,

어릴 적 성장기에 입에 풀칠을(糊口之策) 하면서 보릿고개를 겪고 일찍이 궁핍과 역경에서 처절한 생활고를 체험하고 지금의 ‘베이비 붐 세대’의 성공담을 실화이지만 인명과 주소는 묻어두고 그 사례를 콩트로 엮어보면...

첫 번째 콩트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어느 여학생이 공부를 잘해서 중학교에 진학할 실력은 되었으나 집안의 가난으로 진학을 포기한 안타까운 사정을 담임선생이 알고 중학교에 입학시키고 그 학교 매점에 알바생으로 취직을 시켜 일 년 내내 일찍 등교하여 매점 일을 했는데 어느 겨울 몹시도 추운 날 일찍 매점 문을 열려고 하니 매점 자물쇠가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날은 밝아지면서 학생들 등교 시간은 다가오는데 매점 문이 열리지 않아 당황한 나머지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비통한 생각으로 자기도 모르게 펑펑 울었다는 것이다.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면서 한참을 울다가 반사적으로 다시 열쇠를 작동해 보니 신기하게도 자물쇠가 열렸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서운 추위에 얼어붙은 자물쇠가 잠시 동안 많이 흘린 뜨거운 눈물이 자물쇠 구멍으로 들어가 얼어붙은 자물쇠가 녹았다는 것이다.

나이 어린 여학생의 이 애처로운 사연을 듣기만 해도 눈물겨운 일이며, 이 학생은 고생고생 끝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진학을 하고 거듭되는 역경을 이겨내고 지금 사회중역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두 번째 콩트는

어느 중학교 교장 선생님이 수업을 시켜놓고 운동장을 거닐고 있을 때 검은색 고급승용차가 운동장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오고 있었다.

차에서 내린 두 청년신사는 교장 선생님 앞으로 다가와서 공손히 인사를 하고, 저기 앞마을이 제가 태어난 고향인데, 마을에 살던 친구들은 부모에게 땅을 타가지고 세간을 나갔는데 저는 먹을 양식이 없어서 두 형제가 살기가 막막하여 서울로 오입(悟入)가서 남의 집 헛간에서 잠도 자고 길거리에서 닥치는 대로 행상도 하고 남의 점방에서 심부름도 해 가면서 지내다가 나중에는 고물장수로 성공하여 부자가 되어 고향에 버려두고 간 조상의 묘를 찾으러 왔다고 하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교장 선생님은 그 마을에 데리고 가서 제일 고령인 할머니를 찾아가서 두 청년의 자초지종을 이야기 하였더니 아무개네 손자 같다고 어렴풋이 기억을 더듬어 알려주셔서 묘를 찾고 그 고마움으로 마을에 잔치도 베풀었고 학교에는 창고도 두동이나 지어주어 교장선생님께 보답했다고 한다.

세 번째 콩트는

초등학교 때 소풍을 가서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먹는데 반 친구들은 김밥과 과일과 과자를 푸짐하게 싸서 왔는데 자기는 고작 꽁보리밥만 싸가지고 온 게 너무나 초라해서 내놓지 못하고 나무 밑으로 피해서 왜 이렇게 우리 집은 가난하게 사는가 생각하고 울먹이던 때를 잊지 못하여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오입(悟入)가서 채소장수부터 시작해 안 해 본 장사가 없다시피 하여 부자가 되었다는 사례다.

이와 같은 사실(事實)은 입에 풀칠로 연명하고 보릿고개로 궁핍을 체험하며 자라서 절제할 줄 알았고 성장기에 역경지수가 높을수록 성공률이 높다는 것은 산 증거요 철학이라 할 수 있다.

1930년대 일제강점기를 거쳐 1945년 광복은 우리 농민을 질곡에서 해방을 시켜 주었으나 남북 간 분단의 비운을 맞은 대다가 6.25와 5.16의 격동기를 지나면서 식량난은 더울 격심하여 이사(餓死) 지경에 있었다.

5.16 군사정변을 통하여 1963년 제3공화국 수립 후 공업국으로 시도하는 과정에서 단기적으로 미국 등에서 식량을 대량 수입하여 양곡 부족을 해결하였다.

1960년 초기까지는 식량이 국가안보이고 국가차원에서 국민이 먹고 살면서 생업에 종사하고 나라를 지켜야 하기에 식량자급이 절체절명의 국가의 지상과제였다.

농학계에서 연구 끝에 기적의 볍씨 내병다수성인 통일벼를 필리핀에서 도입하여 박정희대통령이 적극적인 국가시책으로 재배하게 됐다.

통일벼 재배기술 지도기관은 당시 농촌지도소(지금의 농업기술센터)였는데 나는 당시 농촌지도소에 근무하면서 통일벼재배기술지도에 헌신하여 농가 뒤주를 채워준 주역임을 자부한다.

그리하여 1974년 비로소 쌀 4천만 석을 돌파하여 쌀 자급을 이룩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농민의 소득증대와 생활환경이 개선됨에 따라 그 지긋지긋한 입에 풀칠하던 시대와 보릿고개는 역사의 뒤안길로 서서히 사라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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