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식시인11.jpg
▲ 이상식 포항지역위원회 위원·시인
미국 작가 마이클 하트는 저서 ‘랭킹 100: 세계사를 바꾼 사람들’에서 인류 역사상 영향을 끼친 위인을 조명한다. 1위 무함마드에 이어 2위 뉴턴, 3위 예수, 4위 부처, 그리고 5위 공자로 명성을 올렸다.

당시 두 가지 의문이 들었다. 예수가 수석을 차지하지 못한 사실과 동양의 공자가 당당 상위에 부각된 점이 의아했다. 하트의 말인즉 기독교 전파는 예수보다 사도 바울의 역할이 컸던 탓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공자는 왜 그랬을까.

공자는 중국의 본질을 규정한 유가 사상의 창시자이다. 유가는 한무제가 국가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채택한 이후 이천 년 동안 제국의 성격을 결정지은 통치 이념. 장구한 세월에 걸쳐 광대한 땅덩이를 지탱하고, 다양한 종족을 결속하는 주춧돌로 작용한 연대 의식이다. 오늘날 중국은 공자와 유가 사상을 민족정신의 뿌리로 삼는다.

재작년 가을 포스코를 퇴직한 지인과 더불어 중국 배낭여행을 떠났다. 의기투합 중년들의 주유천하. 보름간 여로의 시발점은 태산 등정이었고 다음은 공자와 맹자의 유적지 탐방이었다.

중국 오악 중 하나인 태산은 조선조 양사언의 시조로 익숙한 명산. 중국인에겐 각별한 의미를 가졌다. 진시황 이래 역대 황제가 천하를 통일하고 천지신명에 고하는 봉선 의식을 치른 성소이기 때문이다. 사마천은 기원전 110년 봉선대전의 풍경을 묘사했다. 18만 기병, 천리 깃발, 일만 팔천 리에 이르는 여정. 그것은 한무제의 공적을 만방에 과시하는 상징적 행렬이다.

정상을 향하는 천자의 가파른 돌계단을 걸으며 절대 권력의 외경에 젖었다. ‘등태산 소천하’는 태산을 오른 공자의 감회. 산정에 석비도 놓였다. 우리는 ‘공자애’ 너럭바위서 간식을 즐겼다. 인근 화장실에 들러 상남자 과시의 방뇨도 하였다. 바위로 뒤덮인 마루엔 기상대 간판의 기지가 있었다. 아마도 위장된 군부대가 아닌가 싶다.

공자와 맹자는 동양 사회를 지배한 유가의 핵심 인물. 그들의 학풍은 일맥상통한 것으로 여기나 차이점이 많다. 단적으로 춘추 시대 공자는 인을 완성한 보수주의자다. 반면 전국 시대 맹자는 의를 찾아낸 혁명론자다.

‘논어’와 ‘맹자’는 두 사람의 어록이다. 공자는 ‘인’을 최고의 덕목으로 두었다. 그의 학문은 제자와 후학들 덕분에 정착됐다. 맹자는 가장 중요한 계승자. 공자는 맹자보다 우월한 성인으로 후세의 추앙을 받는다. 각자가 활동했던 정치 사회 배경과 관련됐다. 맹자는 한층 격렬하고 혼란스런 세기를 살았고 그래선지 혁명성이 강했다. 임금도 잘못하면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험컨대 중국엔 자가용 불법 영업이 흔하다. 기차역을 나오면 누군가 접근하여 흥정을 벌인다. 값도 무척 싸다. 넷이 탑승해 일인당 이삼천 원이면 웬만한 거리를 달린다. 그렇게 탑승한 기사가 길을 헤맨 덕분에 맹모의 무덤에도 갔었다. 맹자의 묘역 초입의 신도와 정문은 공사 중이라 입장료가 없었다. 일행을 태워준 운전자가 아성 유택에 넙죽 큰절을 올렸다. 물어보니 맹 씨 후손이라 한다.

언젠가 개그프로의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란 대사가 유행을 탔었다. ‘공묘 공림’과 ‘맹묘 맹림’을 둘러보고 문득 떠올린 아이러니. 맹자의 사적지는 공자에 비하면 너무나 초라한 자태였다. 오두막과 기와집의 비교랄까. 특히 공묘 대성전과 맹묘 아성전은 일인자와 이인자의 간극을 극명히 보여준다. 공맹도 비켜가지 못한 으뜸주의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