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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우리는 평생 자기를 모르고 삽니다. 그게 인간의 숙명입니다. 얼굴에 붙박인 채 자신을 볼 수 없게 되어있는 눈, 타자와 단절된 채 오직 내 안에서만 살아있는 의식(意識·깨어있는 상태에서 자기 자신이나 사물에 대해 인식하는 작용), 깊고 어두운 곳에 숨어 끊임없이 망상을 부추기는 무의식 같은 것들 때문입니다. 모르겠습니다. 죽는 순간에는 그것들이 순간적으로 내 몸과 분리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순간에는 흘낏이라도 내 진정한 모습을 내려다보고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마지막 체험은 별로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왕성하게 살아있을 때 필요한 것이 자아 성찰이지 죽은 뒤에는 그런 것이 필요 없습니다. 사회적으로 존재가치가 이미 소멸된 상태에서 얻는 깨달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할 일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입전수수(入廛垂手·도를 깨친 뒤 세상에 나아가 중생을 제도함)를 강조한 불가의 가르침이 그 이치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자기를 객관화하라!”, 그래서 저는 성장기의 자식들과 제자들에게 그런 충고를 자주 합니다. 어차피 자기를 모르는 게 우리의 숙명이라면 최대한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자신을 파악하는 노력이라도 기울여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날로 새롭고 또 새로워짐), 천편일률적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균형감각을 갖춘 모범적 사회인으로 거듭날 수 있게 될 것이니까요. 물론 저의 노파심에서 나온 말입니다. 제 스스로가 그 수렁에서 나오기가 엄청 힘들었기 때문에(아직도!) 그런 말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다행히도 제게 그런 말을 듣고 자란 이들은 큰 어려움 없이 활발하게 사회생활을 하는 것 같습니다. 부모, 선생 된 자에게는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화가 고흐의 자서전을 읽다가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예술을 하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자기를 모르는 것’이 독이 아니라 약(藥)이 될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고흐가 쓴 편지를 직접 보겠습니다. “(동생에게서 온 편지에) 또 하나는 잡지 ‘메르퀴르 드 프랑스’에 알베르 오리에라는 평론가가 제 그림에 대해 쓴 평론이 동봉되어 있었습니다. 정말 뜻밖이었습니다. 작년에 네덜란드 신문에 실렸던 이사크손 씨의 글에 이어 두 번째 평론이었습니다. ‘중략’ 빈센트 반 고흐는 자연과 더불어 살며 팔레트에서 기쁨을 창조하는 위대한 예술가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빈센트는 이상향의 나라를 믿음과 사랑으로 이 땅에 만들려고 하는 꿈의 소유자라고 표현했습니다. 또한 표현방법에서는 용광로에서 녹아내리는 현란한 보석들의 용액을 화판에 부어내는 몽티셀리의 그것보다 더 화려하고 더 완벽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중략’ 그러나 지나친 과장은 싫었습니다. 제 그림과 몽티셀리를 비교한 부분에서 그의 보는 눈에 한계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저와 몽티셀리는 비교의 대상이 아닙니다. 저는 그를 따르는 보잘것없는 제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몽티셀리는 색을 이용하여 아름다운 음률을 화판에 그리는 시인이며 창조자입니다. 제가 그렇게 되려면 색의 음악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저는 아직 구두 수선공에 불과합니다. ‘후략’” ‘‘빈센트 반 고흐, 내 영혼의 자서전’’

스스로를 ‘구두 수선공’에 비교하며 자신의 영감(靈感)을 지극히 낮게 평가한 고흐는 당연히 ‘자기를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고흐를 기억하지 몽티셀리를 기억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모르는’ 예술의 열정이 남긴 ‘세상의 경이로움’만을 기억하지 그에게 영향을 준 당대의 이름난 화가는 아예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자기를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서, 자기도 모르면서, 세상에 없던 아름다움을 만드는 곳, 그곳이 바로 예술의 세계인 것 같습니다.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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