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남산 보리사 전경
경주 시내에서 임업시험장 못미처 오른쪽에 ‘갯마을’이란 동네가 있다. 먼 옛날 남천이 동해로 흐르면서 나룻배들이 닿는 곳이라 하여 부쳐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뒤쪽 대나무 숲길을 따라 200여m 오르면 ‘보리사(菩提寺)’란 절이 있다. 남산에서 제일 큰 절이다. 삼국사기에 ‘헌강왕릉과 정강왕릉은 보리사 동남쪽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이 있어 신라 사찰로 전해지고 있다. 이곳은 현재 불도 도량선원으로 비구니만 살고 있다.

경주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대웅전 왼쪽으로 오르면, 제일 높은 지역에 석조여래상이 동쪽으로 향해 앉아있다. 경주 남산에 있는 불상 중 모양이 가장 완전한 불상(보물 제136호)이다. 상·중·하대석을 비롯하여 대좌, 불상, 광배로, 불상의 기본 구성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다. 연화대좌에 앉은 여래는 장방형의 반듯한 얼굴로, 긴 눈썹과 오뚝한 코에 조용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결가부좌에 수인은 항마촉지인으로, 석가불로 보는 이들이 많다. 불상 뒤쪽에 있는 광배가 특히 아름답다. 그 둘레에 일곱 개의 화불이 앉아있고, 열한 개의 연꽃이 새겨진 띠가 둘러있어 무척 화려하게 보인다. 이 불상 뒤에 붙은 광배를 보면 약사여래상이 서로 등을 맞대고 조각되어있다. 왼손에 약함을 들고, 오른손은 시무외인을 하고 있어, ‘두려워 마라, 내가 병을 고쳐주마’라고 지친 중생들에게 자신과 용기를 주는 것 같다. 석가불과 약사불, 두 부처님이 한 몸처럼 되어 중생의 생명을 지키고자 함이, 부처님 최선의 자비라는 뜻임을 강조한 것으로 이해하고 싶다.



주차장에서 남쪽 좁은 길을 따라 힘들게 약 50m 오르면 동쪽을 향해 절벽 바위에 불상이 새겨져 있다. 보리사 마애 여래좌상이다. 배 모양의 감실을 파고 그 안에 낮은 돋움으로 조각된 불상이다. 높이 1.2m 정도로 통견을 하고 두 손을 옷자락에 넣고, 결가부좌를 하고 있다. 풍만한 얼굴로 약간 미소 짓듯이 친근한 모습으로 천상(天上)을 나르는 듯하다.

경주남산보리사 물고기불화
대웅전 외벽에는 큰 나무가 등에 박힌 채 고통을 당하는 물고기가 그려져 있다. 옛날 중국에 유명한 고승이 불도공부를 게을리하는 말썽꾸러기 제자에게 벌을 내렸다. 물고기로 만들어 그 등에 나무를 심어 참회를 유도했다. 몇 해 후에야 제자의 애원에 따라 크게 자란 나무를 뽑아 고통을 없애주었다. 어느 날 밤 꿈에 제자가 나타나 스승에게 감사하며, ‘이 나무로 물고기 모형을 만들어 절간에 걸어두고, 사람들이 두드리며 참회하는 도구‘목어(木魚)’로 활용케 해달라’고 청했다. 그래서 목어는 절간 다른 법구(法具)와 함께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소리도구로 사용되어왔다. 그 후 점차 소도구화 되어, 염불할 때 휴대하기 편리한 지금의 목탁으로 변형되었다고 한다. 목탁소리는 불자들에게 참회의 소리요, 불도에 더욱 증진하라는 부처님의 채찍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그림은 불교선원인, 이 절에 잘 맞는 상징적인 불화로 보인다.

경주남산보리사 육화당
비구니 스님들의 선원이 두 채 마주 보고 있다. 적묵당(寂?堂)은 정숙과 침묵을 유지하는 곳이라는 뜻인데, 육화당(六化堂)은 무슨 의미인지 몰라, 스님에게 물었다. 수행자들이 공부하면서 지켜야 할 여섯 가지 계율(戒律) 즉, 그들의 윤리덕목이라고 한다. 몸으로 화합하여 같이 살고, 뜻을 같이하여 일하고, 입으로 화합하여 다투지 말고, 바른 견해로 화합하여 같이 해탈하며, 계(戒)를 서로 지키며 같이 수행하고, 이익이 생기면 더불어 같이 나눈다. 불자뿐만 아니라 일반사람에게도 필요한 삶의 지혜요, 기본도리라고 생각된다.

이 절은 신라 헌강왕 때(886)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그 후 언제부터인가 폐사되어 오다가 1910년대 중창되었고, 지금부터 40년 전쯤 불사가 시작된 이래 1980년 대웅전과 선원을 지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동쪽으로 배반들판과 망덕사지, 사천왕사지, 벌지지 등 여러 신라 유적지를 내려다보고 있는 경관이 좋은 사찰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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