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중국의 수립과 안정에 두 거인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이다. 마오는 오랜 전란과 분열을 종식 시키고 땅의 통일, 빵의 통일, 언어의 통일을 이룬 창업주였다. 실용적이고 사무적인 덩은 죽의 장막을 걷어내고 안으로는 개혁, 밖으로는 개방을 통해 빈궁하고 망가진 중국을 안정시키고 부강하게 만든 총설계자였다.

1963년 항주에서 마오 주제로 중국공산당공작회의가 열렸다. 의제는 ‘중국 사회주의 교육강화(講話)’였다. 기립 표결하는 관례에 따라 반대자는 일어서게 돼 있었다. 그 때 오직 한 사람이 일어섰다. 5척 단구의 덩이었다. 일어선 사람의 키가 앉은 사람의 키와 비슷해 마오는 만장일치로 가결된 것으로 선포했다. 그러자 덩은 자리를 박차고 책상 위로 올라가 끝까지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

감히 마오 안전에서 그런 당돌한 행동은 덩샤오핑이 아니면 누구도 할 수 없는 역공이었다. 마오의 눈에 가시가 된 덩샤오핑은 숙청과 재기의 연속인 파란만장한 정치적 수난을 겪어야 했다. 3번의 실각과 3번의 복권으로 국제공산주의에서 찾아볼 수 없는 ‘삼락삼기(三落三起)’ 부도옹(不倒翁)의 진면목을 과시했다. 하루아침에 권력의 정상에서 시골 공장 노동자로 전락하는 모멸도 감수했으며 문화혁명 때는 장남이 홍위병에 의해 하반신 불구가 된 참담한 아픔도 이겨냈다.

혁명적 열정으로 들뜬 마오와는 달리 신중하고 균형감각을 갖춘 덩샤오핑은 마오의 빛과 그늘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가 고민이었다. 마오로부터 온갖 박해를 받았지만 덩은 중국인들의 전통적인 역사인식인 ‘삼칠개(三七開) 정신’을 적용하기로 했다. 70%는 긍정적으로 평가 공으로 간주하고, 30%는 부정적으로 평가 과로 본다는 인식이다. 긍정적인 부분이 많아야 역사는 진보한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덩은 오랜 동지이자 군부의 거두 예젠잉(葉劍英)을 내세워 마오의 공이 70%, 과는 30%로 정리, 그 과오도 개인적인 오류라기보단 당의 집체적 과오로 판정했다. 이 판정으로 당도 살고 마오도 살고 덩도 개혁을 소신껏 추진할 수 있었다. ‘삼칠개’가 아쉬운 구속 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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