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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며칠간 줄곧 평양 소식이 TV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생각도 못 했던 반전입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제 책상 위의 작은 TV가 다루고 있는 것은 ‘북(北) 여성들에게 유행하는 패션’입니다. 남측 가수들의 공연장에서 카메라에 잡힌 객석의 북측 여성들의 얼굴을 한 사람씩 보여주고 있습니다. 화제는 그야말로 한가한 잡담류에 속하는 것들입니다. 북측 젊은 여성들의 머리 모양, 옷 모양, 평양 음식들, 북측 가수의 앨범 같은 것을 보여주면서 패널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습니다. 그 한가한 장면을 보면서 문득 젊은 시절의 어머니를 떠올립니다. 어머니도 저렇게 고운 시절을 평양에서 보내셨지요. TV를 보면서, 그동안 우리에게 공포를 안기던 여러 가지 끔찍한 상상들이 이렇게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 있는 것들이었다는 게 분하고(?) 억울합니다. 속아도 아주 크게 속은 느낌이 듭니다. 한편으론, 거침없이 쏟아지는 평양 소식들을 이렇게 마음 놓고 그냥 접수해도 되는 건지 아직도 반신반의(半信半疑)의 심정인 것도 사실입니다.

최근 듣는 평양 소식만큼은 안 되지만 몇 년 전 TV에서 본 인천의 박정희 할머니 이야기도 제게는 꽤나 인상적인 것이었습니다. 박 할머니의 노후생활을 보면서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의 노년을 상상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저 연세까지 사셨다면 아마 비슷한 모습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림 그리기를 즐기시는 것, 경기 이북 서북인(西北人) 특유의 어투, 약간 조증이 의심될 정도로 명랑 쾌활하신 것들이 많이 비슷했습니다. 나이 들어 그런 식으로 어머니를 다시 뵙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두 분이 같은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신혼 시절을 평양에서 보내다가 해방 이후(어머니는 전쟁통)에 인천으로 내려오신 것도 같습니다. 다만 박 할머니 댁은 인천에 정착했고 우리 집은 인천을 패스하고 경상도에 정착했다는 것이 서로 다릅니다. 참고로 박 할머니가 쓰신 ‘육아일기’서문의 일부를 옮겨 보겠습니다.

“올해 내 나이 여든하고도 둘이다. 우리 아버지는 한국에서 최초로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점자를 만드신 송암 박두성 선생이다. 나는 경성여자사범학교를 나와 인천에서 교사로 3년간 근무하다 1944년에 평양의전 출신 의사 유영호 씨(현재 85세)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평양에서 시부모를 모시고 살았고 슬하에 4녀 1남을 두었다. 1947년 삼팔선을 넘어 친정이 있는 인천 율목동에서 6·25의 비극을 겪었다. 1·4후퇴 때는 남쪽으로 내려온 시댁 식구들을 포함해 모두 23명의 대식구가 함께 살았다. 남편이 1949년에 인천시 화평동에 의원을 개업한 이후 나는 1952년부터 1963년까지 우리 다섯 아이를 살뜰한 마음으로 보살피며 있었던 재미있고 인상 깊었던 일들을 틈틈이 적었다.”

우리 부모님 세대만 해도 평양은 언제나, 누구나, 가서 살 수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살기 좋은 곳으로 호가 난 곳입니다. 물론 서북인에 대한 차별이 우심해서 경평(京平) 간 지역감정이 요즘의 영호남 지역감정보다 훨씬 더했다는 말도 전해 내려옵니다만 제가 어머니에게서 어려서 들었던 평양 소식에는 그런 것들이 없었습니다. 스무 살 어머니에게는 그런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꿈같은 신혼 시절, 금실 좋게 아이 둘을 낳아 기른 어머니는 능라도, 모란봉, 을밀대, 부벽루 같은 평양의 ‘아름답고 오랜’ 것들만 기억했습니다. 평양은 내내 어머니의 즐거운 추억이 머물던 장소였습니다. TV에서 보는 ‘봄이 온다’가 뜻하지 않게 새 소식과 함께 그 옛날 평양 소식도 함께 전해주는군요. 이러나저러나 흐르는 눈물은 어쩔 수 없고요.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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