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일만 모래바람 뚫고 이룬 제철보국의 꿈

롬멜하우스앞 사기 게양
마침내 영일만 모래벌 종합제철소 건설부지에서 지축(地軸)을 울리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제철소 부지의 기초공사가 항만, 준설, 성토, 정지 이들 4가지 기초공사가 여기저기서 한꺼번에 이루어졌는데 도저, 크레인, 페이로더, 덤프, 롤러, 해머…… 이런 중장비 중장비들은 230만 평 구석구석을 누비며 온갖 궂은일을 해냈다. 황무지에 제철소의 터를 닦은 역군이었다

자금조달과 부지확보의 산을 넘고 또 넘어 숨 가쁘게 달려오면서 수십 년에 걸친 대한민국 종합제철건설사업 숙원은 해결됐으나 실제 대역사(大役事)는 지금부터였다.

건설계획에 따라 1970년 4월 1일 조강연산 103만 톤 규모의 포항제철소 1기 설비 착공 전까지 1968년과 1969년은 제철소로 이르는 모든 길, 즉 바닷길과 철(철도)길, 육상도로를 뚫는 것은 물론 공업용수확보와 준설, 항만시설 축조 등 기초인프라 구축에 혼신을 다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정공기 내에 공장건설을 완료하기 위해서는 부지조성과 동시에 각종 지원시설의 건설이 시급했다. 부지조성과 지원시설 구축은 정부사업과 포항종합제철 자체 사업으로 나눠 동시에 진행됐다.

포항종합제철은 1968년 4월 1일 창립 직후 KISA가 작성하고 있던 일반기술계획서 GEP)의 사전검토에 들어가는 한편 공장건설에 대비하여 5월 1일 포항에 건설사무소를 개설했다. 이보다 앞선 1월 29일 정부는 항만건설 등 부지조성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건설부 산하 ‘포항공업지구공사사무소’를 당시 영일군청앞 지금의 포항북부소방서 2층에 개설했다.

포항제철소 건설을 위한 방파제 축조 현장(1968)
1) 철도와 도로, 공업용수용 댐 건설에 이어 ‘ㄷ’자 굴입항만 까지

정부 차원의 종합제철소 지원시설 확보는 포항제철 창립 이전부터 추진됐다.

1967년 6월 공장 부지가 확정된 후 건설부는 형산강으로부터 냉천 하구까지의 공장 부지 232만 평에 대하여 지질조사를 했다. 제철소는 엄청난 중량의 구조물을 건설해야 하기 때문이다.

항만을 비롯 공업용수·도시토목·철도 인입선 등 기반시설을 정부가 맡아 했는데 68년 4월 25일 철도청은 철도 인입선 부설공사를 착공했고 이 공사를 필두로 건설부는 5월 25일 항만건설, 5월 27일 도시토목, 6월 15일 안계댐 공사를 차례로 착공했다.

철도부설의 경우 1967년 6월 1일 동해남부선의 효자역과 제철소 구내를 연결하는 철도 인입선 공사계획을 수립, 1968년 2월 일부설계를 완료한 후 4월부터 공사에 들어갔다. 괴동역을 새로 짓고 연장 15.2㎞에 이르는 철도를 부설하는 공사로, 연간 150만 톤의 화물을 취급할 수 있는 규모다.

입지선정 후 건설 공사상 가장 시급한 것이 항만건설이었다.

여러 가지 고려사항을 감안해 68년 4월 15일 항만형태를 ‘굴입(堀入)항만’으로 결정하기까지 상당한 진통이 있었다.



항만건설 전경(1968)
굴입항만 건설을 위한 당시 제철소 부지 항공사진
바다가 육지를 파고 들어온 듯한 모양의 굴입항만을 채택하는 데 있어서 우리 측과 일본인 기술 고문 우에노씨 사이에 논란이 있었다. 회사는 이미 확보한 부지를 파서 굴입항만을 만들면 제철소부지가 좁아지고 공장배치관계가 복잡해져 물류 흐름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등을 우려했지만 우에노씨는 공기가 촉박하고, 보유 준설선의 능력이 부족해 공기 내에 준설과 성토를 완료할 수 없다고 맞섰다. 굴입항으로 부지를 파고들어 가면 이때 나온 흙을 성토에 활용할 수 있다는 논리다. 결국, 우에노 고문의 의견이 받아들여졌고, 포항제철소는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굴입항만’을 갖게 됐다. 해안선을 따라 일직선으로 공장을 배치하는 당초 레이아웃으로는 규모를 확장하기 어려운 구조였다. 수십 년 후를 생각하며 공장 배치 계획을 바꾼 것이다.

준설공사를 위해 파이프를 길게 설치
항만건설에서 또 하나의 논란은 바로 방파제 공사방식. 당시 건설부는 케이슨공법(Caisson Method)을, 일본 측은 코러게이티드셸(Corrugated Shell) 공법을 주장했다. 케이슨공법은 모래 위에서 케이슨(콘크리트 상자)을 제작하고 이 주변 모래를 준설하면 케이슨이 물에 가라앉을 때 케이슨을 설치하려는 장소까지 배로 예인하여 설치하는 공법이고 코러게이티드셸공법은 바다에 철근으로 만든 원통을 설치하고 그 안에 콘크리트를 타설하는 공법.

시공하기 쉽고 공기를 단축할 수 있다는 일본 측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결국 경제성과 견고성 면에서 탁월한 케이슨공법로 결말났고 건설부는 이 공법을 적용, 공사 시작 2개월 만에 200m가량의 방파제를 완성했다.

공업용수의 경우 형산강 부조지점을 제1차 개발수원으로 채택했으나 형산강은 갈수기와 농사용 관개기가 겹쳐 제철소 필요량인 하루 10만톤 취수가 불가능하다고 판단,

부조취수장으로부터 서북쪽으로 약 3㎞ 떨어진 안계리에 저수지를 만들어 물이 풍부할 때 저장해 두었다가 갈수기에 사용할 계획이었다.

안계댐은 1968년 6월 15일 착공해 1971년 3월말에 완공했는데 인근 안계리, 유금리, 양동리 등 가옥 160여 동, 전답 25만 평 포함해 총 44만여 평의 토지가 이때 수몰되었다.

진입도로의 경우, 1968년 강동교 포항측 접속도로 1.86㎞, 포항 해도교에서 형산교까지 2.32㎞를 1969년에는 형산교에서 냉천까지 2.78㎞, 강동교의 경주측 접속도로 1.6㎞를 닦고 1970년에는 효자검문소에서 형산교까지의 3.7㎞를 완료함으로써 총 연장 18.56㎞의 도로를 신설하고 포장했다.

제철소 물류 이송을 위한 도로 건설 작업(1968)
모래벌을 일구며 공장을 건설하고 있는 모습 (1967~71)

2, 곳곳에서 난관에 부딪히고…‘사진만장(沙塵萬丈) 입안에는 모래가 씹히고 막상 건설공사에 들어가자 곳곳에서 난관이 발생했다.

일관 제철소 같은 대규모 건설프로젝트 공사를 해본 경험이 없던 당시 국내 사정을 볼 때 종합제철 부지조성과 인프라 구축은 장비와 기술부족이 큰 문제였다. 또 공사 중에 공장배치에 혼선이 생기고 항만조성계획에 차질이 생기는가 하면, 성토량의 부족으로 부지정지계획 자체가 수차례 변경되는 등 어려움을 겪는다.

20~30m씩 치솟는 파도를 막기 위한 방파제 축조도 힘든 장애였지만 신항 건설사업 가운데 가장 험난하고 애로가 많았던 공사 중 하나는 준설공사. 당초 지질조사를 충분히 하지 못해 준설물량이 넘쳐 국내 준설선을 총동원해도 공기 내 준설이 어렵자 긴급 선단을 도입하고 준설선으로 제거할 수 없는 암석은 해군 UDT를 투입, 수중에서 폭파하기도 했다.

황량한 벌판에서 초기 건설요원을 가장 괴롭힌 것은 모래바람이었다. 작업 중에 바람이 한 번 불기 시작하면 눈을 뜰 수가 없을 뿐 아니라 호흡조차 곤란했고, 바람에 날린 모래가 작업복속까지 날아들어 건설요원들은 모래로 샤워하고 입안에 모래알을 씹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공사 진척상황을 둘러보려고 현장을 방문한 당시 주원 건설부 장관은 바닷바람이 휘몰아치는 영일만 모래사장의 눈코 뜰 수 없는 광경을 지켜보며 중국의 황진만장(黃塵萬丈)에 빗대어 ‘사진만장(沙塵萬丈)’이라 표현하면서 직원들에게 보안경을 사 줄 것을 당부했다.

제철소건설의 사령탑 롬멜하우스 전경(1968)
‘제철소건설의 사령탑’ 롬멜하우스

현장에 우뚝 서서 사막전과 같은 공사를 지휘하는 제철소건설본부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사막전의 영웅 롬멜 장군의 야전사령부를 닮았다 하여 ‘롬멜하우스’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5월, 현장에는 슬레이트 지붕의 60평짜리 2층 목조건물 한 채가 들어섰다. 건설 초기 온갖 애환과 환희를 품을 현장사무소를 롬멜하우스라고 부른 것은 적절한 비유.

특히 1969년 3월 이곳에 중장비관리소가 들어서면서 불도저, 크레인 등 늘어선 중장비들이 마치 탱크와 장갑차처럼 보여 롬멜하우스라는 표현이 더 현실성을 띠게 됐다.

롬멜하우스는 낮에는 건설을 지휘하는 사령탑이었지만 밤에는 10명이 채 되지 않는 직원들이 책상을 침대 삼아 담요 몇 장으로 새우잠을 자는 숙소 역할도 했다.

제철소를 짓기 위한 철거와 터 고르기 작업에 나선 건설 요원들은 사막전에 투입된 롬멜의 병사와 다를 바 없었다. 직제개편에 따라 6월 1일부터는 포항사무소로 개칭되었고 7월 8일 박종태 초대사무소장이 부임하면서 공장 부지의 지상물 제거와 부지조성공사의 관리, 정부가 주관 사업의 파악과 보고 등 본격적인 업무를 이곳에서 시작했다. 이 롬멜하우스는 지금 포스코 역사박물관에 그대로 옮겨져서 포스코에서 ‘재산 1호’로부르고 있다.



지하수 시추-꽹과리 부대
꽹과리부대와 똥장군부대

그 시절, 제철소 부지 지질조사를 벌이는 시추공 작업반이 있었다. 지질조사를 하기 위해 시추공을 뚫는 소리는 엄청나게 컸는데 해머소리는 귀에 대고 꽹과리를 울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꽹과리 부대’. 주민들은 지질조사작업을 반대했다. 밤에는 굴착 장비를 훔쳐가거나 부수기라도 할까 봐 보초를 서야 할 정도. 작업반이 시추공을 뚫으려고만 하면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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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웅 논픽선·탐사기록 작가
들은 그 앞을 막아섰다. 그때마다 작업반원들은 머리 숙여 양해를 구하며 하루하루 작업을 진행했다. 꽹과리 부대는 그렇게 제철소 들어설 자리를 마련했다.

또1968년 11월께 수원(水原) 개발에 똥장군이 동원됐다. 당시 연수원 부지로 거론된 괴동동은 산 중턱. 조사단은 연수원에서 쓸 물 공급원을 찾기 위해 시추작업을 했으나 작업에 쓸 물이 없었다. 멀리에서 물을 날라와야 했다. 그것도 산중턱까 물지게로 가파른 길을 오르다 보면 작업장에 도착하면 물은 턱없이 모자랐다. 그래서 동원된 것이 똥장군. 물을 담아 가파른 길을 오르는 데는 똥장군이 제격이었던 것이다.

이한웅 논픽선·탐사기록 작가
김선동 kingofsun@kyongbu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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