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때 정여립 역모 사건으로 발생한 ‘기축옥사(己丑獄事)’는 조선조 옥사 중에 가장 피바람이 몰아친 옥사다. 1000여 명이 희생된 조선 역사상 최대의 사화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선조 22년 1589년 선조는 경천동지할 보고를 받았다. 황해도 관찰사 한준이 선조에게 “정여립이 황해도와 호남에서 한양을 쳐들어갈 모반을 준비하고 있다”고 올린 극비보고였다.

조정이 발칵 뒤집어 졌다. 선조는 낙향에 있던 정철을 다시 불러 우의정에 임명하고 정여립역모사건을 다스릴 위관으로 앉혔다. 동인의 탄핵을 받고 쫓겨났던 서인의 정치 거물 정철은 동인에게 복수혈전을 벌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장장 1년에 걸친 피의 숙청으로 동인들은 떼죽음을 당했다. 이후 서인과 동인은 돌이킬 수 없는 원수가 됐다.

기축옥사 희생자 중 가장 가혹한 화를 당한 사람은 동인의 영수 이발이었다. 이발의 가문은 어린아이들까지도 압슬형을 받고 한 집안이 멸문지화의 쑥대밭이 됐다. 정철과

이발의 악연은 소년 시절부터 시작됐다. 정철이 이발의 집에 들렀을 때 이발과 그의 동생이 장기를 두고 있었다. 정철이 무심결에 훈수를 하자 이발 형제가 ‘역적놈의 자식이 시키지도 않은 훈수를 한다’면서 정철의 턱에 나 있는 수염을 모조리 뽑았다. 정철은 이 때의 일이 뼈에 사무쳐 이발의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든 앙갚음을 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서인 측에서 꾸며낸 것이라고 많이 알려져 있다. 당시 이발 형제는 열 살과 여덟 살이었는데 18세 된 정철의 수염을 뽑는 것은 불가능 하다는 것이다.

정철과 이발이 앙숙이 된 또 하나의 일화는 율곡 이이와 관련이 있다. 율곡의 간곡한 권유로 두 사람이 화합의 자리를 마련했는데 두 사람이 취중 논쟁을 벌이다가 정철이 이발의 얼굴에 침을 뱉은 불상사가 일어났다. 화합을 시도했던 자리가 앙숙을 악화시키고 말았다. 앙숙과 앙갚음이 얽힌 복수혈전은 떼죽음의 피바람을 몰고 온다는 것을 역사가 가르치고 있다.

구속기소 된 이명박 전 대통령이 ‘옥중 입장문’에서 ‘무술옥사’라고 했다. 어떻게 귀결되든 역사에 얼룩이다.

이동욱 논설실장 겸 제작총괄국장
이동욱 논설주간 donlee@kyongbu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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