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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젊어서는 소설을 좀 썼고 이후로는 줄곧 대학에서 현대문학을 가르치고 있는 처지라 본디 한학(漢學)과는 거리가 먼 신세입니다만, 나이 들어서 한 번씩 주역(周易)을 펼쳐 봅니다. 설레며 기다릴 앞날도 없는지라 굳이 점 볼 일은 없지만, 때로 마음을 다스릴 일이 아직도 남은 탓입니다. 주역도 사람이 쓴 글이라 글 쓴 사람의 체취가 물씬물씬 풍기는 특별한 단어나 구절이 있습니다. 이른바 ‘나의 기호’들이 군데군데 보입니다. 우리가 보는 주역의 저자는 주(周) 문왕(文王)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들인 무왕(武王)과 함께 주나라 건국의 시조로 숭앙 되는 이입니다. 공자님이 본인 말씀의 출전을 밝히면서 ‘옛 성인의 말씀’이라고 했을 때 곧잘 그 ‘옛 성인’ 중의 한 분이 되는 사람입니다.

주 문왕이 즐겨 쓰는 말 중의 하나가 ‘이섭대천(利涉大川)’입니다. ‘큰 내를 건너면 이롭다’라는 뜻입니다. 보통은 진퇴(進退)가 걸린 큰 결단을 내려야 할 때나 크게 움직여 새로운 시작을 도모해야 할 때 이 괘가 나오면 길조로 해석하곤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반대로 읽어야 할 때가 많습니다. 주역의 화법은 특이해서 주(主) 문장보다 그 전 단계의 ‘조건’이, 그러니까 종속절의 내용이, 더 중요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말 화법을 두고 하는 말 중에 “우리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끝에 가서 긍정도 되고 부정도 되는 게 우리말 표현의 한 특징입니다. 주역도 그렇습니다. 주역 화법은 ‘막판 뒤집기’의 끝판왕입니다. 일차독법, 이차독법, 삼차독법 식으로 문맥의 진의를 자신의 처지 속에 넣어서 재탕 삼탕 심사숙고해야 합니다. ‘결과는 언제나 변할 수 있다’라는 게 주역의 유일한 결론이라면 결론입니다. ‘이섭대천’을 두고 봐도 그렇습니다. 그것이 주로 사용되는 맥락은 ‘빛나고 형통하며, 곧고 길하니, 큰 내를 건넘이 이롭다’입니다. 그러니까 ‘어둡고 막히고 굽고 흉하면’ 큰 내를 건너지 않는 것이 이롭습니다. 그리고 ‘강을 건너는 일’이 본격적으로 어떤 일에 뛰어드는 것이 아니라 아예 그 판을 떠나는 것이 될 때도 왕왕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전조(前兆)를 자각하는 인격의 힘입니다. 주역은 “인격이 운명을 좌우한다”라고 가르치는 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내를 건너다’가 모험과 도전의 의미를 지닌 ‘새로운 시작’을 뜻한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주역의 저자는 우리네 인생에서 그 ‘새로운 시작’을 매우 중요시했습니다. 주 문왕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을 때 주역을 지었다고 합니다. ‘어둡고 막히고 굽고 흉’할 때에 처하여 ‘이섭대천’을 많이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주역의 ‘나의 기호’가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습니다. 긴 인생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살 만큼 살아본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이섭대천에 대한 주왕의 소견은 참으로 통렬한 통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 문왕은 그런 ‘섭대천(涉大川)’의 절대 필요조건을 심사숙고한 끝에 결국은 성공적인 ‘이섭대천(利涉大川)’을 성취한 역사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에 즉하여, 작금의 ‘적폐청산’과 관련해서 주역 풀이의 한 구절이 제 옷깃을 여미게 합니다. “육삼은 수레가 당겨지고 그 소가 (뒤로) 끌리며, 그 사람이 이마에 문신이 찍히고 또 코를 베이니, 처음은 없으나 마침은 있느니라” (六三 見輿曳 其牛? 其人 天且? 无初有終) ‘왕필, 임채우 옮김, ‘주역왕필주’’ 한때는 권력을 쥐고 흔들던 그들 ‘이마에 문신이 찍히고 코를 베이는’ 사람들의 이섭대천은 과연 무엇이었는지, 그들의 ‘강을 건너는 법’이 도대체 어떤 것이었기에 저런 참혹한 몰골을 자초한 것인지, 타산지석, 반면교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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