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일만 주민들의 희생 위에 우뚝 선 대한민국 '철강의 심장'

포항제철소 초기 부지 전경
“임자! 이거 남의 집 다 헐어놓고 제철소가 정말 되기는 되는 거야? 제철소가 그만한 희생과 불행을 치를 만한 값어치가 있는 거야?”

1968년 11월 12일 국가의 명운을 건 포항종합제철을 건설하기 위해 급하게 마련된 목조현장사무실인 일명 ‘롬멜하우스’의 난간에 선 박정희 대통령은 허허벌판으로 변해버린 영일만 해변을 바라보며 이렇게 탄식 어린 말을 내뱉었다.

건설자금조차 확보하지 못한 채 수백 채의 민가를 밀어버리고 모래바람만 몰아치는 영일만을 바라보는 박정희 대통령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곁에서 박 대통령의 자 조섞인 이 말을 들은 박태준 포항제철사장은 ‘만약 종합제철소를 건립하지 못한다면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포항제철소의 현재 모습

◇포항제철, 마침내 기적을 일궈내다
1967년 당시 1인당 국민소득 150달러를 겨우 넘어선 한국 경제 현실상 건설 초기 총사업비만 1억6천250만 달러에 이르는 대역사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967년 10월 3일 착공해 1970년 4월 1일 첫 삽을 뜬 포항제철은 3년 2개월만인 1973년 6월 9일 오전 7시 30분 마침내 뜨거운 용광로에서 시뻘건 쇳물을 토해냈다.

1965년 고 박정희 대통령의 특명을 받았던 고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과 창업멤버들이 ‘제철소를 성공하지 못하면 우향우해서 영일만에 빠져 죽자’는 우향우 정신으로 그 누구도 믿지 않았던 기적을 일궈낸 것이다.

그것도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설계공정보다 앞당겨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제철소를 건립한 것은 물론 가동 첫해부터 흑자를 내기 시작해 매년 100만t씩 생산을 증대시키는 믿지 못할 일을 해냈다.

그 포항제철이 이제 세계 생산성 1, 2위의 종합제철소 2개를 갖추고, 매년 3천만t씩의 쇠를 생산하는 세계제일의 철강회사로 우뚝 섰다.

제철보국이 꿈을 이루기 위해 고 박정희 대통령과 박태준 명예회장의 집념과 의지가 이뤄낸 한국 역사에서 가장 찬란한 결정이자 업적 중 하나였다.

포스코 건립 부지 확보를 위해 마을 철거를 하는 모습
◇명사십리 마을, 철의 중심으로 변하다
1967년 6월 24일 정부가 포항제철 건설 부지를 선정할 당시 전체 규모는 약 785만4천㎡(238만 평)이었으며, 이중 동촌·송내·송정·괴동·인덕동 등 5개 마을 726만㎡(220만 평)이 포함됐다.

이곳은 동해면 약전리에서부터 두호동까지 이어지는 명사십리 백사장이 펼쳐진 천혜의 절경을 자랑하는 곳으로, 예로부터 어룡사(漁龍沙) 또는 순우리말로 ‘어링불이’라고 불려 왔었다.

영일만 백사장은 폭이 200m가 넘을 만큼 넓었던 데다 모래바람이 많이 불어 백사장 뒤쪽에는 지금의 송도솔숲처럼 해송으로 이뤄진 방풍림이 울창하게 자라 깊은 그늘을 드리웠고, 그 뒤로는 문전옥답들이 경제의 터전이 됐다.

특히 동촌동과 송정동은 포항제철 건설 부지로 선정되면서 마을 전체가 사라져 버려 조선시대 유명한 풍수였던 이성지라는 사람의 예언이 그대로 들어맞았다.

나무를 제거 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
어느 해 여름 영일만을 찾은 이성지는 영일만 일대를 둘러본 뒤 “운제산이 10리만 떨어져 있었더라면 수십만이 살 수 있는 땅”이라고 하자 사람들은 ‘황무지 백사장에 어찌 사람이 살 수 있느냐’며 누구도 이를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어룡사에 대나무가 나면 가히 일만이 살 곳이니라, 서쪽 그릇이 동쪽 하늘에 오면 모래밭이 없어졌더라’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고 한다.

그리고 수백 년이 흐른 뒤 서쪽에서 온 제철기술을 바탕으로 백사장과 바다를 메워 포항제철소가 생겨 백사장은 사라지고 53만 포항시민의 터전이 된 것이다.

1967년 동촌동 예수성심시녀회 주변 전경
△동촌동
동촌동은 현재 포스코 본사를 중심으로 포항제철소 주도로를 따라 영일만까지 이어지는 곳에 형성됐던 마을로 조선초기부터 영일권을 잇는 대송역이 형성될 만큼 중요한 자리에 위치해 있었다.

특히 비옥한 토지와 모래사장, 마을 동쪽으로 냉천이 흘러드는 살기 좋은 곳이어서 포스코가 들어서기 전 400가구가량이 모여 사는 전국에서 가장 큰 단위 마을로 이름이 높았다.

당시 가구당 평균인구를 줄잡아 5명으로 잡아도 2000명이 사는 엄청난 규모였다.

△송정동
동촌동의 서북쪽에 위치한 송정동은 백사장 뒤쪽 큰 솔숲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돼 있어 이름이 붙여 졌으며, 마을 서쪽은 형산강 하구 송도방파제와 마주하고 있었다.

이런 연유로 18세기 후반부터 약 200년간 경주시 강동면 윗부조시장과 연일읍 중명리 아랫부조시장이 번성할 당시 대송진이라는 나루터가 있어 포항 해로의 중심이 됐다.

또한 이 동네에는 예수 성심시녀회 (성모자애원)가 자리해 있었고, 1946년 동지상업학원(현 동지고)이 임시교사를 지어 설립되기도 했다.

△송내동
송내동은 영일만쪽에서 형산강변 내륙을 따라 형성됐던 마을로 지금의 포스코 환경타워를 중심으로 100가구 이상이 모여 살던 곳으로 재첩과 청어·장어·전어 등이 많이 잡혀 일부 어민들의 소득원이 됐다.

특히 송내동은 형산교(송내다리로 불림)를 지나 해병대 1사단과 구룡포로 이어지는 도로변에 위치한 교통요충지였던 터라 동촌동과 함께 해병대 군인가족들이 많이 살았다.

또한 현 동부교회의 전신인 송내교회와 성심시녀회가 운영하는 고아원도 자리할 만큼 제법 큰 동네였다.

지금은 섬안큰다리 아래쪽 칠성천을 가로지르는 작은 다리 이름을 송내교로 붙여 이 일대가 송내동이었음을 알려준다.

△인덕동
인덕동은 포항제철소의 가장 동쪽있던 마을로 마을 동쪽 끝이 냉천과 맞닿아 있었으며, 기름진 농토가 있어 조선 중기 때부터 김해김씨 40여 가구가 농사를 지으며 큰 부락을 이뤘다.

냉천(찬내)은 지금은 물이 많지 않지만, 운제산에서 발원한 찬 기운의 물이 그대로 유지돼 찬내의 여름목욕과 은어잡이는 마을의 자랑이었으며, 현재 이마트 포항점을 중심으로 포스코 사택단지가 건설됐다.

△괴동동
괴동동은 예로부터 마을에 오래된 큰 느티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며, 동북으로 동촌동·동으로 인덕동·서남으로 장흥동·서북으로 송내동과 붙어 있었다.

현재 괴동역을 중심으로 현대제철 후문에서부터 대한통운, 포스코 본사 뒤쪽 한국폴리텍대학에 이르는 지역이 괴동동이었다.

괴동동에는 대송면사무소와 포항경찰서 지서, 대송초 등 대송면의 주요 공공시설이 밀집돼 있었을 만큼 동촌동과 함께 가장 큰 동세를 자랑했었다.

◇어링불이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1967년 오랜 진통 끝에 포항제철 건설 부지가 결정되자 공사시한에 쫓긴 정부는 곧바로 이 일대에 살던 주민들을 대상으로 부지확보에 나섰고,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문전옥답을 버릴 수 없다는 주민들과의 팽팽한 대립이 끊이지 않았다.

개발시대 전국 곳곳이 그랬듯이 한국 경제발전의 핵심이었던 제철소 건설을 위한 정부의 의지는 주민들의 뜻마저 꺾으며 부지보상과 철거, 토지정리를 동시에 진행시켰다.

당시 시대적 상황이나 부족한 예산 탓에 지금 같은 보상을 기대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으며, 결국은 겨우 목숨을 연명할 정도의 보상을 받아 하나둘씩 고향을 떠났다.

이들 중 그나마 여유가 있던 사람은 해도동과 죽도동 일대에 제법 번듯한 집을 지어 나갔지만, 나머지는 오천읍 문덕 4·5리 일대에 마련한 국민주택으로 옮기거나 동해·장기면은 물론 경주시 안강읍을 비롯 타지로 떠나야 했다.

특히 문덕리 국민주택은 블록 벽만 쌓은 채 방문도 마련되지 않아 군용담요로 문을 대신해 사는가 하면, 방 2칸짜리 주택에 2가구가 함께 사는 곳도 부지기수였다.

또한 갑작스레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상당수는 냉천변에서 모래와 자갈 등 골재를 채취하거나 운제산 부근에서 땔감을 마련해 살아가는 고단한 삶이 이어졌다.

심지어 쥐꼬리만 한 보상금을 받고 생활터전을 잃은 일부 주민은 멀리 서울까지 떠나가면서 이제는 소식마저 끊겨 버리기 일쑤였다.

그나마 1990년대 들어 포스코가 제철소 건립을 위해 희생한 이주민들을 돕기 위해 20억원 규모의 장학회를 설립했지만 50년의 세월은 많은 것을 지워버렸고, 포항제철소 내 도로변에 새겨진 작은 표지석들만이 그 옛날을 추억할 뿐이다.

그리고 그 장학회의 기능도 점점 미약해지면서 어렵게 노후를 보내고 있는 이주민들을 위한 지원책으로 전환하고 싶지만, 법 규정에 묶여 제대로 도와줄 수 없는 것에 애가 탄다.

이주 당시 10대 소년이었던 이재흥 PTM사장은 고향 주민들을 위해 지난 2012년부터 매년 1천만 원씩의 장학금과 때마다 작은 정성을 보태오고 있지만, 자신마저 황혼으로 접어들면서 자칫 고향의 기억들이 용광로 쇳물처럼 녹아버릴까 안타깝기만 하다.

오승효 포스코이주민장학회 재단이사장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채 떠나왔던 이주민들의 애환이 잊혀져 가는 게 너무 안타깝다”며 “우리의 바람은 조국 근대화와 제철보국의 꿈을 위해 고향을 떠나야 했던 5천여 이주민들의 희생도 있었음을 기억해 줬으면 하는 것”이라고 털어놨다.
이종욱 기자
이종욱 기자 ljw714@kyongbuk.com

정치, 경제, 스포츠 데스크 입니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