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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행복의 첫째 조건이 무엇일까요? 건강일까요, 돈일까요, 권력일까요, 명예일까요, 배우자(애인)일까요, 자식(후손)일까요. 모두 다 첫째 조건이 될 만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를 가지면 다른 하나가 또 탐이 납니다. 둘을 가지면 셋, 셋을 가지면 넷이 탐이 납니다. 그래서 세간 인생을 두고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운운하는 말이 나온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철학 하는 사람들은 좀 다릅니다. 행복의 첫째 조건을 ‘과거를 잊는 능력’에서 찾습니다. 기억 없는 자에게는 늘 새로운 태양만 떠오른다는 겁니다.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불행한 자들은 모두 제각금의 이유로 불행하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항상 과거에 집착하고 남의 인생과 비교합니다. 과거도 좋은 게 있고 나쁜 게 있을 건데, 좋은 것들은 쉬이 잊어버리고 나쁜 것들만 되새깁니다. 어차피 지구는 울퉁불퉁하고 사람들은 모두 차이 지게 살기 마련인데도 ‘기울어지지 않은 마당’ 위에서의 ‘평평한 비교’를 멈추지 않습니다. 나부터 변할 생각은 아예 없습니다. 결국은 홀로 불행해집니다.

기억이란 자신의 과거와 관계를 맺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개인의 기억은 개인의 행·불행을 좌우하고 집단의 기억은 집단의 행·불행을 좌우합니다. 과거와 관계를 맺도록 도와주는 정체성, 관행과 수단들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기억에 장애가 일어났다면 개인이나 집단적 차원에서 지나온 역사를 상기시키는 그런 매개물들에 큰 변고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최근 ‘드루킹’이라는 닉네임과 관련된 이런저런 불미스런 이야기가 도하 모든 방송 매체의 화면들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불법적인 여론조작의 실체가 드러난 것이라는 주장도 있고 자발적인 시민운동의 일환에 불과한 것이므로 그 자체가 불법은 아니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다만 적, 불법 여부를 떠나서 하나는 분명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사회의 ‘과거와 관계를 맺는 능력’에 심각한 장애가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과거를 잊는 능력’이 행복의 첫째 조건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집단의 기억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기고 오래도록 집단의 불행을 강요하는 것이 될 때는 절대 용납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나라는 누구 한 사람의, 몇몇 뜻이 맞고 유대감이 강한 소수집단의, 한 당파의,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최근 나라 사정은 행복과 불행이 교차하는 형국입니다. 한반도에 비핵화의 비둘기가 찾아들고 정전협정이 평화협정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은 분명 행복의 조짐입니다. 그러나, ‘작은 여우’들이 횡행하고 올바른 ‘집단의 기억’이 생성되는 것이 방해를 받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불행의 단초입니다. ‘미제는 형통하니 작은 여우가 거의 물이 마른 데로 건너다가 그 꼬리를 적시니 이로울 바가 없느니라. (未濟亨小狐?濟 濡其尾无攸利)’라는 주역의 말씀이 생각나는 때입니다. ‘작은 여우(小狐)’들은 자력으로는 대천(大川)을 건널 수 없습니다. 덩치 큰 누구 등에 올라타거나 물이 거의 마른 후에야 건널 수 있습니다. 아직 해결된 것이 아무것도 없는 ‘미제(未濟)의 때’에 처해서는 반드시 강건함으로 어려움을 헤쳐나가야 합니다. 욕심 많고 심술궂은 ‘작은 여우’들이 채 마르지 않은 강물을 건너다 ‘꼬리를 적시’고 있습니다. ‘누구’에게는 읍참마속(泣斬馬謖)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때를 놓치지 말고 대대적인 여우 사냥에 나서야 할 때입니다. 과거를 잊는 능력이 행복의 첫째 조건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평평하게’ 잊어버리는 물화(物化)는 불행에 이르는 지름길일 뿐입니다.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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