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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창우 안전사회시민연대 대표

24일 오전 종로 네거리에서 녹두장군 전봉준 동상 제막식이 열렸다. 바람 불고 쌀쌀한 날씨였지만 현장의 분위기는 뜨거웠다. 관이나 기업 또는 특정 단체에 의존하지 않고 시민 모금으로 동상이 건립되었다. 시민 스스로의 힘으로 역사가 정도로 돌아가는 것 같아 기뻤다.

4월 24일은 녹두장군 전봉준이 서거한 날이다. 사형 판결 바로 다음 날이다. 제막식이 열린 곳은 교수형이 집행된 전옥서 자리다. 바로 맞은편에 의금부가 있었고 근처에 좌·우 포도청이 자리했다.

1894년 12월 2일 장군은 일본군과 일본의 괴뢰군 역할을 한 관군의 토벌 작전 중에 순창 피노리에서 체포된다. 곧바로 일본군에 넘겨지고 서울로 압송된다. 의금부 옥에 갇히고 동지들과 함께 잔혹한 고문을 당했다. 결국, 사형 판결을 받고 손화중, 최경선, 김덕명, 성두한 장군과 함께 참형에 처해졌다.

장군은 교수형이 예정된 일생일대의 처참한 순간에도 “나를 죽일진대 종로 네거리에서 목을 베어 오고가는 사람들에게 내 피를 뿌려주는 것이 옳거늘 어찌 이 컴컴한 도둑 굴속에서 남몰래 죽이느냐?”고 호통을 쳤다. 의연함과 당당함을 잃지 않은 장군이지만 처형을 앞둔 심정이 얼마나 복잡했을까. 녹두장군이 남긴 절명시다.



때 만나서는 하늘과 땅이 힘을 합치더니

운이 다하니 영웅도 어쩔 수 없구나.

백성 사랑 올바른 길에 잘못이 없었건만

나라 사랑 붉은 마음 그 누가 알리.



전봉준 장군을 필두로 농민과 민중들이 들고일어난 역사적 항거를 무어라 불러야 할까. 시대의 흐름 따라 이름이 바뀌었다. 구한말에는 도적을 뜻하는 동비, 일본 식민지 시대와 이승만 정권 때는 동학란, 군사 정권 때는 농민군 또는 동학운동, 동학혁명으로 불렸다.

6월항쟁 이후엔 동학란은 사실상 폐기되고 동학혁명, 갑오농민혁명, 동학농민운동, 동학농민혁명, 1894년 농민혁명이라 불렸다. 지난 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동학농민혁명’으로 성격이 규정된다.

지난해 말 특별법 개정으로 참여자와 유족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조금 더 열렸다. 다행이다. 중요한 것은 진상규명이다. 진상규명 없이는 혁명의 참뜻을 찾기 어렵고 참여자의 명예를 제대로 회복시킬 수 없다. 외세를 끌어들여 자국민을 집단 학살한 만행에 대한 진상규명은 국가의 책무이다. 박은식은 ‘조선독립운동지혈사’에서 “사망자가 30여만 명이나 되었으니 미증유한 유혈의 참상”이라 적고 있다.

봉건사회의 부패 세력과 외세의 침략에 맞서다가 일본군과 이에 부화뇌동한 조선 관군의 무력 앞에 쓰러져간 민중들의 처절한 외침과 절규, 항쟁의 몸짓을 빠짐없이 기록해야 한다. 일본군과 관군의 반인간적인 살육 만행을 낱낱이 밝혀내어 기록하고 후세들이 학습하도록 해야 한다. 진실을 외면하면 반인권 참사는 반복될 수밖에 없고 외세를 끌어들여 자국민을 살해하는 만행 역시 반복될 수밖에 없다.

한국은 일본군이 불법 침공해서 조선 조정을 장악한 뒤 왕을 포로로 삼고 조선군을 지휘하여 동학농민군과 조선 민중을 대규모로 학살한 행위에 대해서 사과 요구도 배상 요구도 하지 않는다. 지금이라도 정부는 1894년 일본군의 조선 침략과 조선 민중 대량 학살에 대해 사과와 배상을 공식적으로 요구해야 한다.

동학농민혁명 참가자는 독립유공자로 지정되는 길이 막혀있다. 보훈법은 1895년 을미사변 이후에 독립운동을 한 인물만 독립유공자로 지정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 참가자들이 서훈을 받고 명예를 회복할 수 있도록 법률을 정비해야 한다.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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