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째 북송 요구 '대구에 사는 평양시민' 김련화씨
이산가족상봉·2차 비전향 장기수 송환 문제 해결돼
27일 제3차 남북정상회담 이후 '인도적 송환' 기대

▲ 제3차 남북정상회담을 하루 앞둔 26일 김련희씨가 서울 낙성대 만남의집에서 자서전을 들어보이고 있다.
7년째 북송 요구 중인 ‘대구에 사는 평양시민’ 김련희(49·여)씨는 27일 역사적 순간만을 기다렸다. 제3차 남북정상회담 이후 정부가 ‘인도적 송환’ 결정을 내려줄 것으로 굳게 믿고서다. 2016년 2월 경북일보와 인터뷰를 가진 지 2년여 만에 한반도 평화를 위한 새로운 시작 때 다시 인터뷰에 응한 김씨는 “가슴이 벅차고 설렌다”며 활짝 웃었다. 그녀는 “문재인 대통령께 인도적 송환을 탄원했다. 조만간 좋은 소식을 주실 것 같다”면서 “대통령님, 제발 북한으로 돌려보내 주세요”라고 간절히 호소했다. 비전향 장기수들이 머무는 서울 낙성대 만남의 집에서 역사의 현장을 TV로 지켜볼 예정이라는 김씨는 “남북 합의서에 기대를 걸고 또 건다”고 했다.

△ 판문점에서 두 발로 평양행…남북 화해 모범 될 것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판문점 만남은 우리 민족사에 길이 남을 대경사라고 입이 마르도록 칭찬한 김씨는 “정상회담 합의서에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합의서에서 규정한 이산가족상봉과 2차 비전향 장기수 송환 문제 해법이 꼭 제시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2000년 첫 남북정상회담에서 합의한 6·15공동선언에 따라 비전향 장기수 63명이 북으로 송환된 뒤 남은 2차 송환 요구자 33명 중 19명만 생존해 있다. 김씨는 자신을 ‘비전향 장기수’로 규정했다.

북한 ‘강제납치피해자구출비상대책위원회’가 지난해 8월 10일 대변인 담화를 통해 “중국 북한식당 여종업원 12명과 탈북자 김련희의 송환이 없으면 이산가족상봉 등 인도사업은 없다”고 했던 발표를 다시 강조한 김씨는 “정부가 북의 요구를 외면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70년 넘은 분단은 한 부모의 형제로 태어난 우리 민족에게 큰 아픔과 고통을 주고 있다”면서 “한반도에 따뜻한 봄바람이 불고 있는 지금,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하는 마음을 가지도록 하는 데 정부가 더 적극적으로 나서달라”고 당부했다.

당 비서인 아버지(78), 신경과 의사 출신 어머니(74), 김책공업종합대학병원 의사인 남편(52), 평양의 신도시인 ‘려명거리’에서 요리사로 일하는 외동딸 리금련(23). 김씨는 이 가족이 너무 그립다고 했다. 3남매 중 맏딸로서 남편과 딸보다 더 부모님이 소중하고 그립다는 김씨는 “내 목숨을 가져간다 하더라도 부모님 얼굴 한 번 보고 죽고 싶을 뿐이다. 그게 최대 소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내가 판문점을 통해 걸어서 북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인도적 송환이 마침내 이뤄진다면 남북 화해의 모범사례가 될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북한 평양 신도시인 려명거리에서 요리사로 일하고 있는 김련희씨의 외동딸 리금련씨. 김련희씨 제공.
△ 스스로 간첩이 된 평양시민 김련희

지난해 8월 15일 ‘나는 대구에 사는 평양시민입니다’라는 자서전을 낸 김씨는 3쇄까지 찍어 모두 판매할 정도로 반향을 일으켰다고 했다. 특히 북한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꾸고 북한을 제대로 알리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평가도 들었다고 했다.

그녀는 어쩌면 스스로 간첩이 됐다. 2011년 9월 16일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속아 남한 땅을 밟았는데, 북으로 돌아가는 길이 막혀버렸다. 김씨는 “평양으로 돌아가기 위해 중국 선양주재 북한영사관의 지령을 받고 국내 거주 탈북자들의 동향을 수집해 넘기려다 자수했고, 항소심에서 집행유예형을 받고 풀려나 지금까지 통일부와 국가인권위원회 등을 찾아다니며 고향으로 보내달라고 울부짖고 있다”고 설명했다.

사연은 201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간경화를 앓던 김씨는 2010년 중국 산둥성 웨이하이시 친척집에서 요양을 하던 중 치료비를 벌기 위해 나간 식당에서 브로커를 만났다고 했다. 한국에 가면 큰돈을 벌 수 있고 6개월만 지나면 중국 등지로 나갈 수 있는 여권도 가질 수 있다고 했다. 6개월만 돈을 벌고 다시 북으로 되돌아갈 심산이었다. 라오스와 태국 등지를 거쳐 2011년 9월16일 남한 땅을 밟았는데, 탈북 동료로부터 “다시 북으로 돌아갈 수 없을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입국 후 국정원에 호소했다. 북송시켜 달라고. 국정원은 그런 선례도 없고 돌아가면 죽임을 당할 수 있다며 김씨의 요구를 거절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 정착해 살아가겠다’는 서약서를 썼더니 그제야 하나원으로 보냈다.

2012년 1월 우여곡절 끝에 경북 경산에 있는 임대아파트에 정착했다.

정착 6개월 만에 여권을 신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입국 당시부터 북송을 요청했던게 화근이 됐다. 언제라도 북으로 달아날 수 있는 요주의 인물이 된 것이다.

북한 영사관에 전화해서 북으로 데려가 달라고 요청했다. 중국까지 오면 공화국으로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받았지만, 중국으로 밀항할 2천만원이 없어 포기했다.

‘간첩이 되면 죗값을 치르고 강제추방 당할 수 있다’는 엉뚱한 궁리를 짜낸 김씨는 그대로 실행했다. 간첩이 된 것이다. 가만히 있다가는 북에 있는 부모님 임종도 못 지키겠다는 생각이 들자 미칠 것만 같아서 다급했던 것이다.

대전의 한 다방에서 기사로 일하면서 그곳에서 알게 된 탈북여성 20여명의 정보를 모았다.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것이다. 여권위조도 시도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경찰에 알렸다. 자수를 택했다. 그런데 간첩죄로 처벌받고도 그녀는 추방되지 않았다. 절망했고, 수차례 자살도 시도했다. 김씨는 “스스로 간첩이 됐지만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합법적으로 북한에 가기로 마음을 바꿨다”고 했다.

아직도 가족이 그리워 눈물로 지새운다는 김씨는 “외국언론이 북한에 방문할 때 나를 인터뷰해서 평양의 가족에게 소식을 전하고 선물도 대신 전해준다. 싱가포르 다큐멘터리 감독이 평양에 있는 가족의 10일 간 일상을 촬영해서 준 동영상을 보면서 그리움을 달랜다”고 했다.

김씨의 심정이다.

“아버지, 어머니 정말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너무 오랜 기간 눈물 흘리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못난 이 딸을 그리다 어머니가 실명했다는 소식을 듣고 저의 가슴은 갈기갈기 찢어졌습니다. 제가 부모님의 품에 안기는 그날까지 부디 건강해 주세요. 딸아. 혼자 있게 해서 미안해. 건강하고 밝게 자라줘서 고마워. 엄마가 금방 돌아갈게. 사랑한다 내 딸 금련아.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님 제 목소리를 꼭 기억하시고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제발 도와주세요.”

배준수 기자
배준수 기자 baepro@kyongbuk.com

법조, 건설 및 부동산, 의료, 유통 담당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