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북도 용천 살 때 6·25 발발···5살 때 가족과 함께 영주로 월남
풍기초·중·고 졸업···대구 계열사 관리 간부로 20여 년 간 근무
군위 섬유 공장에서 1997년 은퇴

돌아가시기 전 까지도 이북의 가족을 그리워 하던 이동욱 회장의 어머니가 소중하게 간직한 가족 사진 평안북도 용천군 동북면에 살던 외갓집 결혼 사진
이북도민 경북연합회장인 이동욱(73) 회장은 평안북도 용천 군에서 6·25 전쟁 때 할아버지의 등에 업혀 부모님(아버지 고(故) 이효순 108, 어머니 고(故) 손영길 107)과 형(당시 12살) 누나(당시 9살) 와 함께 5살 때 경북 영주로 월남 왔다.

남북정상회담을 하루 앞둔 26일 오전 영주시 풍기읍 금계1리에 사는 이 회장 집을 찾았다. 말끔한 정장에 화려한 넥타이를 매고 두 손을 내밀면 반겨 주었다.

집안은 이 회장의 소박하고 검소한 삶이 엿보이는 가훈과 살아가는 교훈을 적어 놓은 글귀들이 벽 가득히 걸려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 회장은 소파에 앉으면서 “내려오자마자 친척이 있나 지인이 있나 도망오다시피 오다 보니 빈털터리로 내려와 당장 먹고 살기가 막막했던 가족들은 안 해 본 일이 없었다”며 당시를 회상하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도 가슴이 아픈 것은 이산가족 신청 한번 해보지 못한 어머니가 이북의 외갓집을 매일 그리워하며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며 “돌아가실 때까지도 북에서 찍은 이모 결혼식 사진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베개 밑에 넣고 돌아가셨지 지금도 어머니 생각만 하면 눈물이 먼저 나”라며 눈물을 훔쳤다. “돌아가신 형님에게 어머니가 이산가족 신청을 하라고 몇 번이고 했지만, 형님은 일부러 신청을 안 했지 어머니가 많이 무심하다고 형님에게 섭섭해 했어 그때는 근데 형님 생각이 깊었지 이북에 남아있는 가족을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어머니에게 더 큰 고통이고 힘겨운 삶이 될 것 같아 안 했던 거지 나중에 형님이 많이 미안해했지 어머니한테”라고 말을 이었다.

이 회장은 “할아버지가 늘 어머니를 구박하시곤 했지 북에서는 그나마 잘사는 유지였는데 아버지의 월남을 어머니가 막지 못해 이런 고생을 하신다며 늘 어머니를 구박하고 힘들게 하곤 했다”고 했다.

이회장이 늘 소중하게 간직하는 사진이다.맨위 왼쪽이 할아버지 가운데 할머니 오른쪽이 어머니다. 하루에도 몇번씩 빛바랜 사진을 꺼내보며 지난날을 회상한다고 한다.
“북에 살 때 어릴 적 내 기억에도 대문이 두 개나 있고 기와집에 우물이 집 안에 있었고 집안일을 하는 일꾼들도 있었으니 잘살았지 늘 어머니한테 가족들이 미안해했지 외갓집 식구들이랑 같이 월남을 하지 못해서 말이야 외갓집은 동만 달랐지 아주 가까이 살았거든” 이라고 말했다.

이 회장은 “부친이 월남하게 된 계기는 해방이 된 후 소련과 중국이 사회주의 체제로 변화되는 시기여서 유지들을 못살게 굴자 늘 아버지는 이래서는 못살 것 같아 남으로 가야 한다고 해 전쟁이 반발하자 바로 내려오게 됐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이 회장은 “언어가 같은 동포가 적대시하고 분단의 상흔에 고통의 나날을 보내는 있다는 것은 가족과 헤어져 사는 이산가족에게는 삶이 힘겹다 두 정상에게도 부모가 있듯 모든 일을 배려하고 포옹하고 대화하는 정치를 펴기 바란다”고 주문했다.

이 회장은 풍기초·중·고를 나와 대구에서 계열사 관리 간부를 20여 년 근무하다 군위에서 섬유 공장을 하다 1997년 일선에서 물러났다.

늘 부지런한 백길순 아내는 요양 보호사 자격증을 비롯한 수지침 등 자격증을 보유하고 봉사 활동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이들 부부는 2남 1녀의 자녀를 두고 있으며 큰아들은 유명한 온라인 게임회사에서 간부로 근무하고 둘째는 식약청에서 셋째는 국회사무처에서 근무하고 있다.

이상만 기자
이상만 기자 smlee@kyongbuk.com

경북도청, 경북경찰청, 안동, 예천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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