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_대구교대교수2014.jpg
▲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남북정상회담’이 불러온 훈풍 속에서 문득 영국 작가 섬머셋 몸(William Somerset Maugham)의 ‘달과 6펜스’라는 소설이 떠오릅니다. 이 소설은 인상파 화가 폴 고갱의 일생을 다루고 있습니다. 예술은 그것을 생산하는 활동 그 자체로 소중한 것이지 그것이 가져다주는 정서적 위안이나 세간적인 이득은 그저 부수적인 것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이 작품의 메시지가 마치 현재의 남북 화해 노력을 두고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듭니다. 예술가에게는 예술이 운명이듯이 우리 민족에게는 통일이 운명입니다. 운명이 손익계산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 느낌을 바탕으로 소설 ‘달과 6펜스’를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이 소설은 그 제목부터 특이합니다. ‘달’과 ‘6펜스’의 돌발적인 결합이 인상적입니다. 달은 불멸의 예술을, 6펜스는 하찮은 세속적 삶을 가리킨다고 말해집니다. 달은 아름답지만 닿을 수 없는 무한의 존재이고 6펜스는 쉽게 얻을 수 있지만 만족을 주지 못하는 소액입니다. 어려서 이 제목을 처음 접했을 때 하필이면 왜 이 제목이어야 하는지 쉽게 납득되지 않았습니다. ‘달과 6펜스’가 ‘예술과 현실’로 대립되는 것이 낯설었습니다. 그 후 달이 가진 여러 메타포를 알게 되고 조금 이해가 되었습니다. 달은 마법과 신비에 많이 가까운 존재였습니다. 6펜스는 그에 비해 쉬었습니다. 처음에는 6이라는 숫자에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12진법을 사용하는 영국에서 당시의 6펜스짜리 동전이 우리나라에서의 ‘오원, 오십원, 오백원짜리 동전’처럼 널리 사용되던 것이었다는 걸 알고서는 숫자 상징에 대한 궁금증은 사라졌습니다. 이를테면 요즘 시중에서 “~한다는 것에 오백원 건다”라는 농담을 많이 듣는 것처럼 당시의 ‘6펜스’도 그 정도의 사회적 가치와 효용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 어린아이들이 내는 교회 헌금이 보통 6펜스짜리 동전 한 개였습니다. 최소한의 사용가치, 최소한의 의무, 현실의 가벼움, 무시하고픈 일상 등등의 의미가 ‘6펜스’라는 말 안에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왜 작품을 전람회에 출품해 보시지 않습니까?” 내가 물었다. “남들의 생각을 듣고 싶어 하실 줄 알았는데요.”

“당신은 그렇소?”

그가 이 두 마디 말에 담았던 그 측량할 수 없는 경멸감을 나는 지금도 다 표현할 길이 없다. “명성을 바라지 않나요? 명성이야말로 대개의 예술가들이 무관심할 수 없는 거 아닙니까?”

“어린애 같은 짓이지. 전문가라는 치들의 의견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데 어찌 속된 무리들의 의견에 신경을 쓴단 말이오?”

“우리가 다 합리적인 존재는 아니지요.” 나는 웃었다.

“명성은 누가 만드오? 비평가, 문인, 주식 중개인, 여자들 아니오?” (서머셋 몸/송무 옮김, ‘달과 6펜스’ 중에서)

스트릭랜드는 손익을 따지는 일상을 거부하고 오로지 자신의 예술적 욕구를 표현하는 일에만 몰두합니다. 운명이 다른 모든 유혹을 압도하기 때문에 그는 오직 그것만 추구합니다. 예술은 일차적으로 예술가들에게 필요한 그 무엇입니다. 운명이니까요. 영리한 예술 옹호자들은 예술가들이 술을 빚어 마시고 떠난 뒤 그들이 버린 술 찌꺼기나 술잔을 주워담는 존재들입니다. 그들이 갖는 것은 고작 ‘6펜스’에 불과합니다. 통일의 손익을 따지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