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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이웃 나라지만 일본은 우리나라와 많이 다릅니다. 업무상 출장이나 관광여행 목적으로 며칠씩 다녀올 때마다 매번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 근자에 느낀 것 중에 몇 가지만 들어보겠습니다. 일본에는 차도에 과속방지턱이라는 게 없습니다. 제가 사는 아파트 지하주차장 입구에는 이중으로 과속방지턱이 설치되어 있어서 들어갈 때마다 차가 요동을 칩니다. 차단기도 있는데 그렇게 또 턱을 높여서 모든 운전자에게 경각심을 주문합니다. 또 하나는 저녁 무렵 지하철(도시철도)역에서 볼 수 있는 나이 든 회사원들의 퇴근 모습입니다. 50대 이상의 남녀들이 깔끔한 옷차림을 하고 무리를 지어 행군하듯 일사불란하게 퇴근합니다. 전직 소설가의 입장에서 그들의 표정과 자세를 한 번 살펴보았습니다. 자세나 표정이 일견 엄숙단정합니다. 교양도 있어 보이고 자신의 삶에 대한 자부심도 느껴집니다. 지하철에서 만나는 그 나이 또래의 우리나라 사람들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무엇인가 분명한 목적과 목표가 있는 삶을 살고 있다는 표정과 자세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런 차이점들과 관련성이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일본의 한국인 학교에 참관실습을 나가보면 우리나라 교생(敎生)들이 그쪽 선생님들에게 엄청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걸 느낍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양쪽이 다 스트레스를 주고받습니다. 그쪽에서 볼 때 우리 쪽은 전혀 교육자로서의 준비(사명감과 희생정신)가 안 된 불량품들이고 이쪽에서 볼 때는 그쪽의 문화가 지나치게 전체주의적이고 희생을 강요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보통은 한 일주일 같이 지내면서 서로를 알아가고 서로의 문화를 양해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어떤 경우는 끝내 접점을 찾지 못하고 볼썽사나운 파국을 맞이하는 경우도 간혹 있습니다. 같은 민족인데도 그렇습니다. 달라도 참 많이 다른 두 나라입니다.

고적(古蹟)이나 유적(遺蹟)의 형태도 많이 다릅니다. 우리나라처럼 같은 성씨들로 이루어진 양반 마을은 일본에서는 찾기가 어렵습니다. 소문난 명가(名家)나 모범이 되는 부잣집의 유적도 보기 힘듭니다. 노포(老鋪)라고 해서 오래된 상점은 곳곳에 있습니다만 우리의 경주 최부잣집이나 구례 운조루(雲鳥樓) 고택 같은 ‘곳간의 미학’을 지닌 양반가옥은 없는 것 같습니다(안 보여 줍니다). 육연(六然)과 육훈(六訓)이라는 최부잣집의 가전(家傳) 계명은 너무나 유명합니다. 특히 ‘가뭄이 들었을 때 남의 전답을 사지 마라’라는 대목은 이웃을 사랑하는 ‘곳간의 미학’이 빛을 발하는 부분입니다. 운조루도 마찬가집니다. 끼니를 잇지 못하게 되면 누구라도 와서 한 끼의 쌀을 내갈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운조루 쌀뒤주’가 너무나 유명합니다. 뒤주에는 ‘타인능해(他人能解·누구나 열 수 있다)’라는 글귀가 선명합니다. ‘이웃이 곧 세계다’라는 21세기의 글로벌 화두를 우리 선조들은 이미 수백 년 전부터 착실히 실천에 옮겨왔던 것입니다.

일본의 고도(古都)들을 둘러보면 감탄이 절로 납니다. 고적 관리가 우리보다 많이 앞서 있습니다. 그러나 그쪽의 빈틈없는 고색창연(古色蒼然)에는 조장된 완결미가 승(勝)해서 장교어졸(藏巧於拙·교묘함을 어리숙함 속에 감춤)의 깊은 속내를 찾기 어렵습니다. 국민성도 그렇습니다. 사생결단 하는 비장한 국민 정체성도 좋지만, 서로서로 내색 없이 도와가며 사는 이웃사랑도 훌륭한 국민 정체성입니다. 지나치게 국민의 수준을 낮게 평가해서 곳곳에 과속방지턱을 설치하는 도로행정도 그렇게 이해합니다. 운조루의 쌀뒤주가 이제 제 역할을 다하고 전시품이 된 것처럼 그런 행정 정체성 역시 언젠가 사라질 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나저나, 요즘의 민족화해 정국을 접하면서 문득 ‘정치가 제1의 교육이다’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정치만 제대로 되면 굳이 국민교육 필요성도, 곳간의 미학도, 과속방지턱도 필요 없는 날이 곧 오지 않을까요?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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