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태권도협회 원로 오광웅 씨, 생계 위해 운동 시작해 예 가르치며 후배 양성 노력

대구태권도협회 원로이자 한국미술대전 초대작가인 오광웅 씨. 윤관식 기자.
태권도 공인 9단의 원로가 노년에 ‘서예 9단’으로 변신해 화제다. 대구태권도협회 원로위원이자 무봉서화연구실을 운영하는 서예가 오광웅(76)씨가 주인공이다.

지난해 가장 권위가 있다고 정평이 난 한국미술대전에서 서예작품으로 초대작가가 된 이후 빛나는 노년을 보내고 있다. 그는 “서예를 통해 공부에 매진하고 옳은 정서를 목표로 모임도 자주 가진다”면서 “연구실 문을 항상 활짝 열어놓았으니 서예나 학문을 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언제든 환영한다”며 활짝 웃었다.

△생계로 시작한 태권도, 예를 가르치는 스승이 되다

1956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의 인생이 보인다.

14살이던 그는 생계를 위해 태권도를 시작했다. 2년 뒤 태권도 초단을 땄고, 41년 세월이 흐른 1997년 12월 9단의 자리에 올랐다.

2003년에는 9단 모임도 직접 만들었다. 당시 국기원에서 이사를 역임하던 시절, 후배를 양성하는 데 자문할 수 있는 곳을 만들자는 취지로 회칙을 정한 후 국기원에 승인을 받았다. 현재 국내·외 9단 140∼150명이 모임에 속해 있다.

9단을 받은 지 20년이 지난 오 씨는 “8단 받고 만 8년이 지나야 9단 응시 자격이 있고, 6단이나 7단은 만 7년이 지나야 딸 수 있다. 9단을 받은 사람은 아무리 역사가 짧아도 40년 이상이다”며 “지금 전국 9단 순번도 선배들이 돌아가시면서 살아 있는 사람 중 9번째가 됐다”고 설명했다.

오씨는 1967년 7월 태권도를 가르치는 도장(백파)을 개관해 제자를 육성했다. 모두 6개의 도장을 운영한 그는 당시 함께 고생한 제자 중 지도력이 있는 제자에게 체육관을 물려줬다.

그는 “내 말을 듣고 운동만 죽으라고 하면서 선수생활을 한 제자 중에 지도력이 있어 보이는 친구들을 뽑아서 도장을 줬다”며 “전세금 3000만 원으로 도장을 꾸렸으면, 제자에게 무료로 빌려주는 방식이다. 도장에서 나오는 수익금을 적금으로 넣게 해서 3∼5년 동안 돈을 모으면 그때 완전히 넘겨주는 식으로 물려줬다”고 설명했다.

학생들을 바른길로 인도해달라는 지인의 부탁을 받고서는, 칠곡중학교에서 무료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69년의 일이다. 2년 뒤에는 학교를 옮겨 다니는 순회 코치로 임명됐다. 2년간 칠곡중, 대구공고, 경일중에서 활약했다.

오씨는 “무료로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당시 교장 선생님이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경북도교육위원회 순회 코치 제도에 추천해서 순회 코치가 됐다. 당시 월급이 1만5000원이었다”고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또 “칠곡중 태권도부 창설 1년도 안 돼서 우승했다. 칠곡중 독수리 마크를 직접 만들었는데 당시 다른 선수들이 겁을 먹어서 시합을 못 하기도 했다”며 “5∼6체급에서 메달을 따기도 했는데 7년 동안 경북소년체전 태권부를 싹쓸이하다시피 했다”고 자랑했다.

그는 태권도가 예를 중시하기 때문에 아이들의 필수 교육 부문이라고 강조했다.

오씨는 “태권도 도장이 아직도 인기가 많은 이유는 예를 중시하는 교육을 하기 때문”이라면서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고 생각한다. 가르치고 배우면서 함께 성장한다는 뜻인데 절대 내가 잘 가르친다고 자만하지 말고 가르치면서도 배우는 것이라고 본다”고 강조했다.

오광웅 씨가 자신의 연구실에서 서예에 몰두하고 있다. 윤관식 기자.
△ 학문 연마에 봉사까지…서예가로 제2의 인생

오씨는 서예를 시작한 20년이 넘었다. 1992년 약전골목에서 효정 권혁택 선생에게 사사 받은 후 2002년부터 작품 전문 서예인의 길로 들어섰다. 끊임없이 초대작가에 도전한 결과 지난해 타이틀을 얻었다. 그는 “(태권도)협회 일에 신경을 쓰다 보니 시간이 없어서 공부를 한 4∼5년간 안 하다가 조금씩 취미로 시작했다. 작품 전문 서예인으로 공인으로 받으려고 애를 쓴 것은 2002년부터고 만 15년 만에 한국미술협회 초대작가를 받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초대작가는 30∼40년 해도 못 따는 사람이 많다. 문화관광부에서 인정하는 게 이거 하난데 점수 10점 따기가 그렇게 힘들었다. 나는 떨어져도 계속 작품을 하고 도전해서 작년에 초대작가가 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태권도를 가르치면서 강성으로 자리 잡은 오씨의 성격도 서예를 통해 많이 누그러졌다. 문인화를 하면서 사경을 중점적으로 공부하고 글을 쓴다. 오씨는 “서예를 하면서 차분해졌다. 제자들이 내 눈을 쳐다보지도 못했는데 요즘은 많이 풀어졌다”고 미소를 지었다.

뛰어난 서예 실력으로 봉사활동도 열심이다. 그는 “팔공산 도림사에서 가훈을 써주는 봉사도 했다. 이는 일명 가훈 보시로 사찰을 방문하는 모든 불자들이 가훈을 부탁하면 모두 다 들어준다”고 했다.

오광웅씨는 “태권도를 계속해 오면서 국회의장상, 대통령표창, 김대중 정부 때 백마상 훈장도 받았다. 원도 한도 없고 내가 죽기 전까지 지인들과 옳은 정서로 살다가 갔으면 좋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며 남은 생의 목표를 밝혔다. jjy8820@kyongbuk.co.kr

전재용 기자
전재용 기자 jjy8820@kyongbuk.com

경찰서, 군부대, 교통, 환경, 노동 및 시민단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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