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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용섭의 신삼국유사] 60. 김유신이 소정방을 죽이다

고구려·백제 이어 신라를 치려고 했기 때문

윤용섭 전 학국국학진흥원 부원장 등록일 2018년05월10일 20시43분  
▲ 뙤다리
삼국유사는 말한다. 또한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총장(總章) 원년(668년)에 당군(唐軍)이 평양 교외에 주둔 하면서 서신을 보내어 급히 군수물자를 보내달라고 했다. 왕이 여러 신하들을 모아놓고 묻기를, “적국에 들어가서 당병이 주둔하여 있는 곳으로 가기에는 지세가 험하여 극히 위험하다. 그러나 당나라 군사의 식량이 떨어졌는데도 군량을 보내지 않는다는 것은 역시 옳지 못하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는가?”하였다.

김유신이 아뢰었다. “신 등이 능히 군수물자를 수송하겠으니 청컨대 대왕께서는 심려치 마시옵소서.” 이에 유신과 인문 등은 군사 수만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국경 안으로 들어가 군량 2만곡을 수송하여 주고 돌아오니 왕은 크게 기뻐하였다. 또한 군사를 일으켜 당군과 합세를 하고자 먼저 연기, 병천 등 두 사람을 보내 회동할 날을 묻자 당나라장수 소정방이 종이에 난새(鸞)와 송아지를 그려 보내 주었다(紙畵鸞犢二物). 사람들이 그 뜻을 몰라 원효에게 청해 물으니, 해석하여 말하기를., “군사를 속히 돌이키라는 말이다. 난새와 송아지를 그린 것은 두 반절(反切)을 이른 것이다.”라고 풀이하였다. 즉, 원효는 송아지와 난새의 그림을 ‘화독화란(畵犢畵鸞)’의 반절음으로 읽고 ‘속환(速還)’의 의미로 해석했다. ‘화독(畵犢)’의 반절음은 ‘혹’이 되고, ‘화란(畵鸞)’의 반절음은 ‘환’이 된다. 합하면 ‘혹환’이 되는데 ‘속환’과 음이 비슷하다. 물론 ‘혹’과 ‘속’은 음이 다르나, 당시 신라 음에는 ‘혹’과 ‘속’이 통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원효가 암호를 해독해 주었기에 많은 신라군이 위기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유신은 군사를 돌이켜 패수를 건너려 할 적에 군령으로 나중에 강을 건너는 자는 베리라 하였는데, 군사들의 반이 강을 건너갈 적에 고구려 군사가 와서 미쳐 건너지 못한 병사들을 죽였다. 다음날 유신은 고구려 병사들을 추격하여 수만 명을 죽였다.

『백제고기(百濟古記)』에 이르길, “부여성 북쪽 모서리에 큰 바위가 그 아래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서로 전하여 이르기를 의자왕과 여러 후궁들이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차라리 자진을 할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 하여 서로가 이끌고 와서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으므로 속칭 타사암이라 한다.” 고 했으나, 이것은 속설이 와전된 것이다. 다만 궁녀들은 그곳에서 떨어져 죽었으나 의자왕이 당나라에서 죽었다는 것은 당사(唐史)에 명문으로 전한다.

또한 『신라고전(新羅古傳)』에 이르기를, 소정방이 백제와 고구려를 치고 또 신라도 치려고 머물러 있었다. 이 때 유신이 그 모의를 알고 당나라 병사들을 초대하여 향연을 베풀고 독약을 먹여 죽이고는 구덩이에 묻었다. 지금의 상주 경계에 당교(唐橋)가 있는데 이것은 그들을 묻은 땅이라고 전한다.

당교에서 김유신이 소정방을 죽인 사실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9 경상도(慶尙道) 함창현(咸昌縣) 교량(橋梁)조에도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당교(唐橋). 현의 북쪽 6리에 있다. 신라고기(新羅古記)에, “소정방이 이미 고구려와 백제를 치고 또 신라를 치려고 여기에 머물렀을 때, 김유신(金庾信)이 그 계획을 알고, 당의 군사에게 잔치를 베풀어 취하게 하고 모두 여기에 묻어 죽였다. 뒷날 사람들이 그것으로 당교라고 이름 지었다.” 당교의 위치는 문경시 모전동일대 또는 상주시 함창면 부근으로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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