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불구불 삐뚤삐뚤···돌담따라 발길따라
대구광역시 팔공산 자락에서 발원한 남천·동산계곡 물길(위천 상류)이 만나는 지점 바로 위쪽에 자리 잡고 있다. 순수한 우리말로 ‘한밤마을’이라 불리는 이곳은 제주도를 닮은 돌담으로 널리 알려져 있어서 많은 사람이 알음알음 찾아오고 있다.
마을 내력을 좀 더 알아보면 한밤마을이 제주도를 닮았다는 이야기에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제주도는 돌과 바람, 그리고 여자(해녀)가 많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 가운데 여자를 제외한 돌과 바람이 한밤마을에도 많이 있으니 괜히 제주도를 닮았다는 게 억지는 아닌 셈이다.
이처럼 돌이 많이 있었던 것은 마을 터를 잡을 때부터 땅을 파면 돌이 나와 그 돌을 주춧돌 삼아 집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있고, 1930년 여름 홍수 때의 일로 늦은 밤에 두 시간 넘게 퍼부은 비가 골짜기를 순식간에 휩쓸고 가면서 발생한 산사태와 수해로 93 가옥이 유실되고, 92명이 죽거나 다쳤으며 360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고 한다.
대율리교회 옆으로 가면, 둔치를 따라 이어진 높이 2m 정도의 단면이 사다리꼴 모양인 돌축대를 볼 수 있다. 현재 800m 정도가 온전하게 남아 있다. 팔공산 돌들이 한밤마을로 쓸려왔고, 사람들은 그 돌로 담장을 쌓은 것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지 않고 오히려 재해를 활용해 마을을 꾸몄다는 사실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이처럼 한밤마을은 모든 것을 잃었던 슬픔과 절망 속에서 새로 태어난 뼈아픈 과거를 가진 마을이다. 비단 집뿐만 아니라 마을 내에 자리 잡은 과수원과 밭에도 돌담을 둘러놓은 것이 눈길을 끈다. 돌이 많다 보니 바람 때문에 농사가 시원치 않았던 것을 떠올리고 돌담으로 바람을 막았으니 자연의 순리를 슬기롭게 대처한 선조들의 지혜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날씨가 더워지자 담을 덮고 있던 푸른 잎들이 상큼하기 그지 없고, 그대로 달려와 안아줄 것 같은 포근함이 느껴진다. 집집 마다 경계를 이루고 있는 돌담들은 집을 구분 짓는 하나의 벽이라기보다 집 사이로 난 미로(迷路)였다.
한밤마을 걷기는 주차장을 출발해 마을 북쪽 입구에 조성된 성안숲부터 시작한다. 성안숲은 팔공산 자락이 마을의 동ㆍ서ㆍ남 방면을 성처럼 둘러싸고 있는 데서 비롯한 이름이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홍천뢰 장군이 의병을 훈련 시켰던 곳이기도 하고, 마을을 보호하는 신성한 공간으로의 의미도 깊다. 도로 양쪽으로 각각 만들어진 성안숲에 몸을 이리저리 뒤튼 소나무들이 마을의 모습을 보일락말락 감추어 보호막 역할을 하고 있다.
북쪽에서 불어오는 겨울 찬바람을 막아주는 것이 주목적이었을 것이고, 여름에는 솔바람이 휘도는 시원한 쉼터 역할을 했을 것이다. 현재는 마을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908번 도로로 인해 숲이 양쪽으로 갈라졌지만, 옛날에는 숲도, 마을도 한데 모아져 있다 보니 규모가 제법 컸다고 한다.
이 같은 바람은 1930년 대홍수가 난 이후로 그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졌을 것이다. 그래서 1966년에 화강암으로 진동단 솟대를 세웠다고 한다. 한밤마을 어디에도 우물이 없다는 점인데 풍수지리학상 마을 자체가 배의 형상이다 보니 우물은 배에 구멍을 뚫는 거나 마찬가지란 이유에서다. 우물이 없는 것이 마을이 형성된 시점부터인지, 아니면 대홍수 이후 만들어진 금기인지는 알 수 없다.
임진왜란 때 이 마을 출신으로 영천성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홍천뢰 장군이 의병들을 모아 훈련을 하기 위해 만든 숲으로 숲 한가운데에 홍천뢰 장군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성안숲을 천천히 둘러보고 나면 본격적인 한밤마을 산책이 시작된다. 한밤마을로 들어가는 입구 앞에 간략한 마을 안내도가 있으니 참고하면 된다. 한밤마을은 대율1, 2리와 남산1, 2리, 동산1, 2리 등 6개 리로 이루어진 큰 마을이다.
앞에서 이야기했지만 한밤마을 걷기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어주는 대율리 대청(大廳)은 꼭 기억해 둘 일이다. 이 마을 자랑거리이기도 하지만 전통가옥들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다 보니 돌담길을 걸을 때 위치 파악에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이 대청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62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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