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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식 포항지역위원회 위원·시인
책을 고를 때 목차와 서문을 참고하는 경우가 많다. 저자의 의도와 집필 방향과 전체 대강을 파악할 수 있어서다. 나의 경우 두근거리는 맘으로 머리말을 꼼꼼히 읽는다. 그런 연후에 일독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서적을 살펴볼 것인가를 결정한다. 한 권의 도서가 독자를 만나 유혹하는 엄숙한(?) 순간에 다름 아니다.

윤동주의 ‘서시’는 모두가 즐겨 애송하는 서언이다. 물론 유고 시집을 출간하면서 의미가 부여된 것이나, 시인의 철학이 오롯이 배인 머리글. 근자에 탐독한 ‘케임브리지 중국사’의 감사의 글도 인상적이다. 아니 독특한 일갈이다. 왠지 진정성과 자존감이 엿보여 은연중 신뢰를 품었다.

지은이 ‘패트리샤 버클리 에브리’는 적었다. “이 책을 쓸 때 책상을 깨끗이 치워 놓고 기억 속의 중국 역사를 꺼내오기보다는 책과 논문을 책상 위에 쌓아 놓고 작업했다.”고 고백한다. 또 “논문 연구자는 내가 임의로 채택하고 참고 문헌에 언급하는 것으로 끝났다며 불쾌해하지 말고, 자신들의 증거와 주장에 내가 설득을 당했다는 사실을 기뻐해 달라.”고 당당히 요구한다.

영국 철학자 존 로크는 “역사만큼 많은 것을 가르쳐 주는 학문이 없고, 역사만큼 재미있는 학문도 없다.”고 했다. 세계사를 접하면서 공감을 느끼는 주장이다. 사실과 추론에 근거한 인류사 무용담은 흥미진진하다.

개인적으로 가장 매력적인 인물은 고대 로마의 권력자 율리우스 카이사르이다. 군사적 재능뿐만 아니라 뛰어난 정치적 수완을 가진 지도자. 게다가 탁월한 문학적 능력까지 지녀 다재다능하다. 그의 파란만장한 삶은 경이로움 그 자체다. 오늘날 서양사는 그의 발자취에 진배없다.

일본 작가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는 총 15권의 대서사시. 그중에 두 권은 카이사르 일대기를 다루었다. 전쟁 문학의 걸작인 ‘갈리아 전쟁기’는 그의 뛰어난 필력을 보여준다. 자기 자신을 1인칭이 아닌 3인칭으로 표현하여 객관적 서술을 지향했다. 그의 구술로 완성된 갈리아 전쟁기는 당시 베스트셀러로 출간됐다고 한다.

로마 제국에 카이사르가 있었다면, 조선에는 이순신이 있었노라 감히 자랑한다. 기원전 1세기를 풍미한 대제국의 영웅과 기원후 16세기쯤 활약한 약소국의 위인이기에 단순 비교는 어렵다.

하지만 두 사람은 공통점도 많다. 문무겸전의 지휘관이고 대기만성의 출셋길이며 전쟁 와중의 처절한 문헌을 남겼다. 난중일기와 갈리아 전쟁기는 둘 다 생사가 불투명한 전쟁터의 생생한 체험기. 누구나 기록을 남길 수는 있으나, 후세에 가치 있는 글은 인문학적 소양이 갖춰진 경우에 나온다.

지난달 473주년 탄신일을 맞은 충무공 생애와 관련하여 청춘들에게 하고픈 얘기다. 결론을 말하면 이순신은 뒤늦은 나이에 진로를 수정하여 성공한 장본인. 그는 초년에 문과 과거 시험을 준비하다가, 장인의 영향을 받아 무과로 전향하여 32세에 합격했고, 이후 삼도수군통제사 자리까지 올랐다. 요즘으로 치면 해군 참모총장 격이니 상당한 관직이다.

충무공이 ‘한 우물을 계속 팠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가정은 부질없다. 공시족으로 유랑할 수도 있었을 터다. 고뇌 끝의 방향 선회로 이룬 구국의 횃불. 인생엔 다양한 옵션이 놓였다. 초지일관하는 의지가 전부는 아니다. 그 분별력을 가르침은 우리 선배들의 몫. 단념은 결코 패배를 뜻하진 않는다. 돌아서야 할 때의 포기는 빛나는 용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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