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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가끔씩 박사 논문이 배달될 때가 있습니다. 제가 교육대학에 근무하니까 주로 국어교육과 관련된 논문들입니다. 그런데 근자에 올수록 제목이 난해해지고 있습니다. ‘학습 목적의 대화적 발표 교육과 **’, ‘쓰기 교육의 전이성(轉移性) 문제와 **’, ‘정보텍스트의 추론적 읽기특성과 **의 문제’, ‘메타시 문학교육 제재의 효용과 **’과 같은 어려운 제목들이 많습니다. 비단 국어교육에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소설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례로 ‘신경향파 소설과 젠더배치의 상상력’, ‘제로 초점화를 통한 민중 여성의 비애 폭로’, ‘주석적 서술자의 등장과 일원적 반영묘사’ 등과 같은 세분화된 전문용어들이 스스럼없이 제목까지 올라옵니다. 소설 한 편에 대한 설명을 듣기 위해서 어려운 관련 용어부터 먼저 공부해야 됩니다. 그 과정에서 소설 자체의 재미는 다 달아나 버립니다. 누구나 먹을 수 있는 싸고 맛있고 배부른 음식이 아니라 요리사의 현란한 칼솜씨만 과시하는 맛없고 불편하고 비싼 요리를 대하는 형국입니다.

무릇 전문용어라는 것은 그냥은 안 보이는 것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인데 당금 학계의 상황을 보면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자명한 것을 더 복잡하게 설명할 때가 많습니다. 특히 교육학이나 인문학에서 그런 경우를 많이 봅니다. 저희 같은 ‘늙은 말’들이 볼 때는(옛말에 ‘늙은 말에게 길을 묻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공연한 동어반복일 때가 대부분입니다. 그런 경우들을 볼 때면 학문과 환상이 도통 구별되지 않습니다. 몇몇 사람들끼리 자기들만의 환상에 대해서, 굳이 안 해도 될 것들에 대해서, 심각해 하는 것이 학문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제가 해 본 것에 한정해서 말씀드리면, 적어도 국어교육학계와 소설학계는 다분히 그런 것 같습니다. ‘환상 속에 그대가 있다’가 딱 그쪽의 현 상황입니다. 딱합니다. 혹시 자기 이야기의 궁핍에서 생기는 ‘개념(어려운 말)으로의 도피’는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평생 관여한 학문이 요즘 들어 환상에 가까운 허깨비 몰골이라고 말씀을 드리자니 제 신세가 급(急) 처연해집니다. 평생을 도로(徒勞)에 몸 바쳐 왔다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환상이 인간의 본체(本體)다’라는 역(逆)주장 하나를 균형잡이로 소개합니다.

“그러나 어쨌든 간에, 인간집단은 불안정하다. 집단은 무한히 확대를 계속해 갈 수는 없는 것이고, 그것을 지탱하는 공동환상(共同幻想)은 결코 개개인의 사적환상(私的幻想)을 완전히 흡수할 수는 없다. 개개인에게 나누어진 공동환상은 초자아 및 자아가 되고, 공동화되지 않고 남은 사적환상은 이드를 구성한다. 이 이드가 공동환상에 기초하는 집단의 통일성을 내부로부터 위태롭게 하는 중대한 요인이 된다”‘기시다 슈(우주형), ‘게으름뱅이 정신분석’’

인간집단은 환상 없이는 공동체를 구성할 수 없습니다. 공동환상은 윤리가 되고 이념이 됩니다. 크게 보면, 인류 문화 자체가 공동환상입니다. 타자들과의 공존을 위해 공동환상은 개인의 사적환상을 흡수합니다. 공동환상에 흡수되지 못한 사적환상들은 불필요한 사회적 갈등을 야기합니다. 폭력의 형태로 공존을 위협합니다. 인간집단의 안정과 동요, 발전과 퇴보는 결국 공동환상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유지해야 할 공동환상이 무엇인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될 시점에 놓여있습니다. 다른 것들은 차치하고서라도, 우리 민족 간에 공존, 평화, 발전을 가져다줄 공동환상이 무엇인가에 허심탄회하게 동의하고 합의하는 게 급선무입니다. 행여 타민족들이 보기에 당장은 그것이 ‘환상 속에 그대가 있다’일지라도 말입니다.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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