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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성환 문경지역위원회 위원·문경문인협회장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 성년이 된 우리는 그 이후에도 ‘돈’의 냉엄함을 알지 못하고 지냈다. 그저 옆집 친구가 공장을 차리는데 돈이 부족하다며 농협에, 새마을금고에, 신용협동조합에 대출을 내는 데 보증을 서달라고 하면 두말 안 하고 서주었다.

기껏 저자에서 돼지고기 한 근 구워서 소주 한잔 하는 인심이면 충분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서로 믿었으니까. 친구의 숨소리만 들어도 그의 마음을 알았고 눈빛만 봐도 그의 뜻을 알았다. 구차하게 말하는 것이 오히려 불편할 지경이었다.

그거 뭐, 도장 한 번 찍었다고 그리 잘못될 일이 있을까 무지하기도 했다. 돈 내주는 금융기관의 종사자들도 모두 또 한 동네 사람들이라, 돈 한 푼 안 쓴 보증인들한테까지야 매몰차게 하리라 생각도 못 했다.

그것이 1997년 말 ‘IMF’ 이전의 농촌 풍경이었다. 그러나 듣지도 보지도 못한 ‘IMF’는 자연재해 ‘사라호 태풍’ 이상의 피해와 혼란을 가져왔다. 어릴 때부터 그때까지 맺어 왔던 공동체의 정(情)이 태풍에 날아갔다.

‘보증서는 자식은 낳지도 마라’는 말을 어른들로부터 우스개 삼아 들었던 기억이 봄바람에 새털 일어서듯 살아났다. 채무자인 친구들은 하던 일을 접고 어디론가 멀리 사라졌다. 돈을 써보지도 만져보지도 못한 보증인들은 그저 그들이 여기서 더 버틸 수 없어 가는가보다 여겼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금융기관들은 새로운 채권추심기관이나 다른 수임기관에 채권 회수를 위탁하거나 인도했다. 그러자 전혀 다른 곳에서 보증인들한테 독촉이 왔다. 채권자가 채무자나 연대보증인 누구에게나 채권추심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돈 쓴 사람한테 가서 받으라’는 항변은 통하지 않았다. 법원으로부터 지급명령이 날아오고 이의를 제기했지만 소용없었다. 법대에 앉은 판사는 연대보증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연대보증을 서지 않았다는 증거가 필요했고, 그 외의 주장들은 괜한 시간 낭비였다.

한 채권증서에 연대보증인이 2~3명 되었기 때문에 떠나간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독촉을 받는 사람은 몇 배로 늘어났다. 조그마한 한 마을이 빚의 공포로 인심마저 사나워졌다.

그러고도 벌써 20년이 지나간다. 그러나 아직도 그런 피해는 이어지고 있다. 지금은 대출하는데 연대보증인제도가 없어졌다는 데도 그 이전에 이루어진 연대보증 피해가 상존하고 있는 것이다.

(사)금융소비자연맹이 최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정부가 채무자 지원은 펼치고 있지만, 선량한 연대보증인들의 채무는 관심을 두지 않아 채무자들보다 더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어 채무자와 동등한 ‘보증채무 탕감’ 정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만시지탄(晩時之歎)이지만 고소원(固所願)이다. 문화의 대변혁기였던 ‘IMF’. 그 때문에 생긴 그 이전의 불합리로부터 새로운 제도의 이익을 누리게 하는 것은 기본 법리일 터. 하루속히 그 당시 정(情) 많았던 사람들의 경제적 고통을 들어주어야 하리라.

그리고 말하리라. 그 당시 돌레돌레 살면서 연대보증 한 번 안 서고, 남의 빚 한 번 안 갚은 사람과는 술도 한잔하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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