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월산 두르고 반변천 흐르는 옛 31번 국도 숲길

▲ 영양 대티골 아름다운 숲길 나무 징검다리
경북 영양 일월산 자락에 일제 수탈의 아픔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는, 한(恨) 서린 길이 있다. ‘대티골 아름다운 숲길’이다. 경북 봉화·영양·청송과 강원도 영월을 잇는 240㎞가 넘는 도보 길인 ‘외씨버선길’ 일곱 번째 ‘치유의 길’ 일부 구간이기도 하다.

영양으로 가는 길은 온통 초록으로 가득했고 며칠 내린 비로 미세먼지도 없고 푸른 하늘을 보여주었다. 눈부신 5월 햇살에 온통 초록 물감 가득한 풍광이 잠시 세속을 잊게 한다.

영양읍에서 31번 국도를 따라 봉화로 향한다. 길을 따라 좌우를 오가며 유유히 흐르는 물줄기가 바로 반변천이다. 영양을 이야기할 때 물줄기는 반변천, 산줄기는 일월산(日月山)을 빼놓을 수 없다. 일월산에서 발원한 반변천은 영양을 남북으로 종단한 뒤 청송을 지나 임하댐에서 낙동강과 만나는 물줄기다. 길이는 109.4km, 반변천 발원지는 윗대티에 있다. 북쪽으로 달리는 길 좌우로 깎아지르는 듯한 절벽이 거대한 석상처럼 버티고 서 있다. 절벽 퇴적층을 따라 나타나는 초록 물결이 아무리 잘 그린 진경산수화인들 여기에 비하랴. 길옆 곳곳에 심어진 붉은 단풍나무가 녹색 푸르름과 묘한 대비를 일으키며 눈길을 끈다.

옛 국도 길은 원래 영양군 일월면과 봉화군 재산면을 잇는 31번 국도였다. 산의 등줄기와 목덜미를 잘라 길을 냈다. 일월산에서 캐낸 광물을 봉화군 장군광업소로 실어가기 위해서였다. 해방 후에는 일월산의 질 좋은 소나무를 베어내 옮기는 임도(林道)로 사용됐다. 이처럼 ‘수탈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한(恨) 맺힌 길은 새롭게 포장된 직선도로가 생기면서 우리 기억에서 조금씩 잊혀져 갔다. 자연스레 발길이 끊어졌고 길은 방치됐다. 금강송이 즐비한 옛 국도길 중간에 서 있는 ‘영양 28㎞’라는 빛바랜 이정표가 수탈과 훼손의 아픈 역사를 증언하고 있을 뿐이다.

영양 대티골 아름다운 숲길 안내도
대티골 아름다운 숲길은 영양군 일월면 용화리 일월산자생화공원에서 시작해 대티골 경로당, 대티골 숲길 입구, 진등 반변천 발원지 쉼터, 칠(칡)밭목 삼거리(옛마을길 끝 지점), 반변천 발원지 이정표, 큰골삼거리, 대티골 주차장, 숲길입구, 일월산자생화공원으로 다시 돌아오는 7.6km 정도 거리다. 천천히 걸으면 3시간 정도 잡아야 하지만 형편에 따라 중간에서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어 부담 없이 다녀올 수 있다.

일월산자생화공원에 남아있는 옛 광산.
출발지인 ‘일월산자생화공원’은 1939년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경북 내륙의 가장 깊은 일월산까지 들어와 광물을 수탈해 갔다. 일월산 광산에서 캐낸 금, 은, 동, 아연은 일본 나카가와광업주식회사에서 건설한 선광장으로 옮겨 광물을 제련했던 곳이다.

대티골 안내판
공원을 지나 31번 국도를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왼편으로 ‘자연치유 생태마을 대티골’을 알리는 커다란 녹색 표지가 눈에 들어오고 좀 더 걸어가면 ‘토속신앙 본거지 총본산’, ‘일월산 황씨 부인당’을 알리는 표지가 보인다. 바로 오른쪽 봉화로 향하는 새로 난 포장도로가 있지만 지금 걸어야 할 길은 수탈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길이다. 곧바로 좁은 포장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왼쪽에 황토구들방 집 앞에 쉼터 정자가 있다.

외씨버선길 안내 리본
이곳에서 그대로 올라가면 대티골 주차장과 큰골 삼거리로 가게 되고, 오른쪽 외씨버선길을 알리는 리본과 안내판을 따라 옛 국도로 향한다. 길 옆에는 전봇대와 통신선이 나란히 한다. 새 도로가 생기면서 용도 폐기된 국도가 전국에 한두 곳이랴마는 이 곳이 새삼스러운 이유는 예전에 차가 다녔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신작로 길이고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슬픈 역사의 아픔을 간직한 길이라는 점 때문이다. 수십 굽이를 돌고 돌아 일월산 자락을 아우른 뒤 봉화로 넘어간다.

영양 28Km 옛 이정표
일월산은 해발 1219m로 경상북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새로 난 국도는 영양과 봉화터널을 지난다. 터널이 뚫리면서 길이 직선으로 나기 전까지 옛 국도는 이렇게 산 중턱을 돌고 돌며 꼬불꼬불 길을 냈다. 일제가 일월산 용화광산을 개발하고 광물을 효과적으로 수탈하기 위해 만든 길이다. 삽이나 곡괭이 같은 가장 기본적인 도구로 이 험한 산에 길을 내거나 광물을 옮겨간 이들 모두 시대를 앞서 살았던 우리 조상들이었다.

하지만 새로 국도가 개설되자 쓸모없는 길로 방치되었고, 광산도 문을 닫게 되자 물자 수송로의 역할도 자연스레 끝났다. 옛 국도는 평탄하게 잘 다듬어져 있고 굽이도 심하지만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잘생긴 소나무들 사이로 나 있다. 네댓 명이 나란히 걸을 수 있을 정도로 넓다. 혼자 생각에 잠겨 걸어도 좋고 여럿이 수다를 떨며 걸어도 좋을 길이다.

옛 국도를 따라 천천히 주변 풍경을 보면서 가다 보면 첫 쉼터가 나온다. 여기서 잠시 쉬었다 가도 좋다. 정말 이 길로 차가 다녔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군데군데 돌로 쌓고 무너져 내린 흙을 치우며 다듬은 흔적이 보인다. 왼쪽으로 일월산 정상에 설치된 군사시설물과 초록 능선이 눈에 들어온다.

두 번째 쉼터가 나오는데 여기서 왼쪽 내리막은 진등 방향 반변천 뿌리샘 가는 길이다. 칠(칡)밭목 삼거리 방향으로 향한다. 조금 걸어 올라가다 보면 왼쪽에‘영양 28km’라는 녹슬고 칠이 벗겨진 오래된 이정표를 보니 반가우면서 착잡한 마음이 든다. 조금 오래된 것이라면 무조건 없애거나 버리는 것이 예사인 요즘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반변천 발원지
잘살아보자는 새마을 운동으로 인해 소중한 물건들이 소리 소문 없이 우리 주변에서 사라졌고, 일제의 잔재를 없애야 한다는 목소리 때문에 살아남은 것들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이 이정표가 남다르게 보이는지 모른다. 쓸모없고 보기 싫다고 뽑아다 고철로 녹여 버렸다면 슬픈 역사의 흔적 하나가 사라졌을 것이다. 사람들 발길과 관심이 없었던 오지에 있었기에 그나마 살아남은 것은 아닌지.

다시 옛 국도를 따라 걷다 보면 외씨버선길 끝나는 곳에 칠(칡)밭목삼거리 갈림길이 나온다. 왼쪽으로 가면 대티골 아름다운 숲길로 이어지고 오른쪽은 봉화로 가는 외씨버선길이다. 칠밭목 또는 칡밭목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칡이 산을 덮고 있어 칡을 일부러 심어 놓은 밭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그 주변은 울창한 낙엽송과 소나무 숲으로 이루어져 있다. 작은 계곡 옆에는 봄부터 여름까지 피어나는 야생화가 볼만하다고 한다.

반변천 발원지 뿌리샘
대티골에서 가장 윗 쪽에 자리 잡은 집을 보며 시멘트로 포장된 내리막을 가다 끝나는 곳에서 왼쪽 흙길로 접어든다. 조금 진행하면 반변천 발원지 뿌리샘을 알리는 이정표가 있다. 잠시 반변천 뿌리샘을 찾아 나선다.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아 다녀올 만하다. 내려가는 길 주변은 산림자원보호구역을 알리는 팻말이 줄에 매달려 있다. 반변천 발원지인 뿌리샘은 동굴처럼 둥근 암반에서 많은 물을 쏟아내고 있다. 물이 차갑고 시원하다. 반변천 발원지에서 큰골로 가는 옛 마을길로 내려가도 처음 출발지로 갈 수 있다.

일단 왔던 길을 다시 올라 서서 왼쪽으로 가다 묘가 있는 곳으로 진행한다. 하늘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울창한 숲길은 완만한 오르막과 내리막의 연속이다. 중간에 마을 주민이 설치한 그네와 긴 의자가 눈에 들어온다. 일월산 0.8Km 이정표를 뒤로하고 계속 걷는다. 평탄한 길이 끝나고 계곡을 건너면 급한 내리막이다. 크고 작은 돌과 쌓인 낙엽이 있어 조심해야 한다. 계곡 물소리 들으며 내려가는 길이 심심하지 않다. 큰골 갈림길에 다다르면 거의 다 온 셈이다.

텃골, 깃대배기, 깨밭골, 칠(칡)밭목, 말머리등, 샘물내기, 왕바우골, 그루목, 쿵쿵목, 진등 등 걸으며 만나는 옛 마을 이름을 딴 이정표가 얼마나 정겨운지 모른다. 일월산에는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 야생동물 1급인 수달과 2급인 담비, 삵을 비롯해 너구리, 족제비, 노루, 고라니, 멧토끼가 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옛 국도 주변은 온통 금강송으로 빼곡한 송이밭이기도 하다. 한동안 송이 때문에 일반인 출입이 통제되는 등 갈등을 빚었지만 지금은 사시사철 찾아갈 수 있다.

돌에 글을 새긴 표지석
대티골 숲길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 것은 2006년이다. 대티골 사람들이 막히거나 무너진 숲길을 보수하고 정비해 생태 치유의 길로 가꾸어 옛 국도뿐만 아니라 댓골길, 옛마을길, 칠(칡)밭길 등을 ‘아름다운 숲길’로 되살려냈다. 길 중간중간에 그네와 의자 등을 갖춘 쉼터를 만들고 이정표를 세웠다. 이 같은 노력으로 대티골 숲길은 2009년 ‘제10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숲길 부문‘아름다운 어울림 상’을 받았다. 우리나라에 걷기 열풍을 일으켰던 제주 올레길보다 1년 먼저 열린 길이 바로 대티골 아름다운 숲길이다. 길에 의미를 부여하고 새로운 개념으로 받아들이면서 방치되었던 옛길이 그 어느 길보다 아름다운 숲길로 태어난 것이다.

▲ 글·사진= 윤석홍 시인·도보여행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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