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이 일생의 롤 모델로 존경하는 도주공(陶朱公)은 춘추 말기 월나라의 명재상 범려다. 중국 4대 미녀 중 한사람인 서시의 연인이었던 범려는 ‘와신상담(臥薪嘗膽)’을 주도, 오나라와의 복수혈전에서 승리를 이끈 뛰어난 책략가였다. 한나라의 한신보다 훨씬 먼저 토사구팽(兎死狗烹)의 이치를 터득한 정치고수였으며, 도주공이라 불린 당대 최고 재벌로 ‘상신(商神)’, ‘재신(財神)’의 경지에 이르렀다.

인생의 매듭마다 잇고 끊고 할 때를 잘 판단, 아름답게 마무리해서 정치 경제뿐만 아니라 자신과의 싸움에서도 모두 성공, 멋진 인생의 귀감이 됐다. 권력에 도취하거나 금력에 집착하지 않아 널리 베풂의 삶을 실천, 진정한 대인의 모습으로 인생을 매듭했다.

월나라 구천을 도와 오나라를 정복한 범려가 월나라를 떠나려 하자 구천은 나라의 반을 주겠으니 떠나지 말라고 말렸다. “교활한 토끼가 죽으면 용맹스런 사냥개는 죽게 된다”면서 “고생은 함께할 수 있어도 즐거움은 함께할 수 없다”는 말을 남기고 제나라로 떠났다.

제나라에서도 범려에게 재상 자리를 제의했지만 “관리로서 재상까지 오르는 것은 인간의 극치이지만 존명을 받는다는 것은 상스럽지 못하다”며 거절했다. 가지고 있던 재산을 모두 희사하고 당시 상공업 중심지인 도(陶)라는 곳에 가 이름을 주공(朱公)으로 바꾸고 산업을 일으켰다.

범려는 19년 동안 세 번이나 막대한 재산을 이룩해 그 중 두 번은 구차한 사람들과 먼 일가친척들에게 나눠주었다. 사마천은 범려의 이 같은 베풂의 선행에 대해 “이 사람이야말로 이른바 부(富)하면 즐겨 그 덕(德)을 행하는 자”라고 찬양했다. 사마천이 ‘화식열전’에서 범려를 제일 높이 평가한 것은 돈을 크게 버는 능력을 가졌지만 돈에 끌려다니지 않았으며, 부에 천착하거나 쌓아두고 혼자 흡족해하는 대신 널리 베풀고 훌훌 떠난 겸허한 처세 때문이다.

‘따뜻한 옆집 할아버지 같은 대기업 회장’, ‘선행을 베푸는 소탈한 회장님’ 재벌 회장으로서 겸손과 베풂의 삶을 실천하고 사후에는 나무로 돌아간 구본무 LG회장에 대해 쏟아진 찬사는 범려를 생각나게 했다. 살아서도 소박했고, 죽어서도 소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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