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통해 세상의 무서움·참혹함 배워"

오옥균 여사가 포항 흥해읍 자택에서 호국영웅기장증을 들어보이고 있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조국을 지킨 순국선열과 호국 영령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며, 국민의 호국ㆍ보훈의식, 애국정신을 함양하기 위해 지정됐다.

현충일, 6·25전쟁, 제2 연평해전이 모두 6월에 일어났는데 특히 6·25전쟁 당시 국군은 물론 전국 각지의 학도의용군의 희생과 이역만리 타국의 우방을 돕기 위한 참전국의 도움으로 이 나라를 수호할 수 있었다.

특히 전·후방에서 다친 군인을 치료하고 철도 업무· 군복 제작 등 지원업무에서 또 다른 ‘전투’를 여성 유공자들의 피와 땀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현충일을 앞두고 이들을 만나 호국의 역사를 직접 들어봤다.

오옥균 여사(앞줄 왼쪽)가 6.25 전쟁이 발발한 1950년 여름 친구들과 단체 촬영을 한 모습.
“전쟁은 개인의 삶을 뒤틀고, 나라의 운명을 위기로 몰아넣습니다. 부디 공부하고 스스로 힘을 키워야 합니다”

국군간호사관학교를 1기로 졸업해 간호장교로 6·25 전쟁에 참전하고, 1970년대 파독 간호사로 근무하며 우리나라 현대사를 관통하는 삶의 오옥균(85·포항 흥해읍)여사의 당부다.

1950년 6월 25일. 여느 때처럼 서울 제기동 성당에서 성가 연습을 하던 그녀는 라디오 뉴스특보를 들었다.

‘이북 놈들이 남침을 했으니 집에서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

167㎝ 훨친한 키에 한약방을 운영하던 6대 독자 아버지 슬하에서 유복하게 자랐다.

장래희망이 역사학도·성악가인 꿈 많던 인텔리 청춘의 운명이 뒤틀리는 순간이었다.

이틀 후 부산 가는 피난 열차에 전농동 고향 집을 지킨다는 아버지를 제외한 모든 가족과 함께 몸을 실었다.

기차가 수원에 다다랐을 무렵 ‘한강 철교 폭파’소식을 들었다.

“조금만 피난이 늦었더라면 예고 없는 폭파에 목숨을 잃을 뻔했다”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대전에서 피난 생활을 이어 가던 오 여사는 간호사관생도 모집 벽보를 보았다.

장학금·용돈·미국 유학을 보내준다는 내용으로 냉엄한 현실에 밀려 꿈을 접고 차선책의 인생을 선택하는 상황이었다.

2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120명의 동기와 함께 온기조차 없는 기숙사에서 고된 공부와 실습을 마치고 간호장교로 마산 제1육군병원에 임관했다.

하루에 200명이 넘는 부상병들을 돌봐야 했다.

오옥균 여사(앞줄 가운데)가 1954년 요셉병원 근무 시절 동료들과 기념 단체 촬영을 하고 있다.
제대로 된 시설도 없고 약품도 부족했지만 ‘나라를 지키는 군인을 치료한다’는 사명감 하나로 힘겨운 하루를 버티며 환자들을 보살피는 나날이었다.

오 여사는 “파상풍에 걸려 사흘 만에 손 쓸 수도 없이 전사하는 병사, 수류탄에 팔을 잃고 우는 학도병, 톱으로 환부를 도려내는 의사와 함께 환자의 피와 고름과 씨름하는 간호장교 중 한 명으로서 또 하나의 전투를 치르며 하루하루가 전쟁터였다”고 회상했다.

국가는 이러한 공로를 인정해 2008년 국가유공자 증서를, 2013년에는 호국영웅기장증을 수여했다.

전쟁 휴전까지 3년 동안 육군 소위로 군 생활을 마친 그녀는 어머니의 권유로 남편을 만나 4남매를 키웠다.

하지만 운명의 수레바퀴는 그녀를 또다시 독일로 이끌었다.

1971년 10월 1일 국군의 날. 경제적 어려움 속에 있던 그녀에게 ‘독일에 간호사로 가는데 언니도 함께 가자’고 후배가 권유했다.

초등학교 입학식을 앞둔 막내가 눈에 밟히는 40대 주부로서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교사 등 투잡 (Two-Job)을 해도 3만 원을 벌기 힘든 시절, 40만 원의 거금의 월급을 받아 자녀들을 키울 수 있다는 희망에 타국 생활이 힘든 것만은 아니었다.

여분의 돈으로 TV를 사서 독일어 공부를 해 6개월 만에 귀가 뚫렸고, 수녀 같은 생활을 하며 하고 싶은 유럽 여행, 먹고 싶은 음식을 참으며 기숙사 비용을 제외한 모든 월급을 고국으로 송금했다.

특히 선진국의 시민 의식과 검소함을 몸으로 배웠고, 3년 만에 ‘독일에 남아 달라’는 권유를 뿌리치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희생으로 4남매는 학업을 무사히 마치고 건실한 가정을 지킬 수 있었다.

오옥균 여사는 “유복하고 순진한 소녀에게 전쟁은 세상의 무서움과 전화(戰火)의 참혹함을 가르쳐 줘 ‘역설적으로 6.25가 사람을 만들었다’가 느낀다”고 지난 삶을 회고했다.

이어 “슬픈 교훈의 경험을 잘 활용해야 하지만 지금은 다음 세대에게 지난 역사를 너무 안 가르치고 있고 교육도 너무 자주 바뀌고 있어 걱정이 크다”며 “최근 화해 무드로 평화도 좋지만 ‘도끼 만행’ 등을 저지른 북한을 완전히 신뢰할 수 없다. 개인과 국가 모두 공부를 열심히 하고 국력을 키워 방비를 잘해야 한다”고 거듭 조언했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