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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영미(필명 최라라) 시인·포항대학교 간호학과 겸임교수

나는 간호사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간호사였다. 사명감을 가지고 시작한 일은 아니었지만 어느 순간 나는 누군가를 간호하는 일이 내 운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오랜 병원 생활 기간에는 정작 깨닫지 못한 일이었고 사직을 하고 다른 직업으로 전환했을 때에야 비로소 내게 들어 온 생각이었다. 그것이 지나간 일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것 또한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운명이라는 것은 지난 후에야 알게 되는 것이다. 그때 그랬다면 어땠을 것이다, 그때 그렇게 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다 등으로 우리는 현실을 합리화한다. 그렇게 하면서 운명이라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훌륭한 간호사는 아니었던 것 같다. 응급사태가 벌어져 환자의 목숨이 위태로운 순간에는 울음을 참느라 입을 꾹 다물었으며 목 놓아 우는 보호자들을 볼 때는 같이 눈시울이 붉어져 할 일을 놓치곤 했다. 훌륭한 간호사는 냉정하게 자기의 소임을 다할 줄 알아야 한다. 임종 환자의 사후 처치를 신속, 정확하게 끝내고 다시 빈자리를 만들어 새로운 환자 받을 준비를 할 줄 알아야 한다.

벌써 이십 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잊히지 않는 한 환자가 있다. 그녀는 자궁경부암 말기 환자였다. 40대 초반의 체격이 좋은 환자였는데 말기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밝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여성의 자궁경부암은 치유 확률이 높은 병이다. 그런데 그녀는 병마가 자신의 몸을 갉아먹고 있다는 사실을 오랫동안 감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아프다는 말보다 행복했다는 말을 더 자주하는, 내가 아는 한 유일한 말기환자였다.

그녀는 사탕을 유난히 좋아했다. 그녀 옆에는 언제나 아몬드 사탕 봉지가 놓여 있었는데 근처에 가면 몇 알을 집어 주머니에 넣어주곤 했다. 그런데 그녀는 잘 표현하기 어려운 악취에 쌓여 있었으므로 그녀가 주는 사탕마저도 불편했다. 그런데 어느 날은 그녀가 사탕을 까서 입에 넣어주겠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받아먹게 되었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으나 나는 그것을 받아먹었다. 분명 달콤하고 고소한 사탕의 맛이 혀끝에서 감돌았지만 내 머릿속은 굳이 그 맛을 음미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녀의 악취와 그녀의 검은 손등만이 내 혀끝에서 녹아나고 있었다.

정말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에도 마트에 들릴 때면 유난히 그 사탕 봉지가 눈에 띈다. 지금 그 환자의 얼굴은 아득하다. 참 서글서글한 눈매였는데 자세히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그녀가 어느 나라에 대해 몇 번이나 말하곤 해서 그 나라가 궁금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그곳이 어디였는지 기억이 나지도 않는다. 다만 진열대에 즐비한 아몬드 사탕을 보는 순간 고통처럼 그 날들이 떠오르곤 한다. 나는 아직 그 사탕을 장바구니에 담아본 적이 없다.

일본의 한 수필가는 한 소나무 앞에서 사진을 찍었는데 그때 같이 사진 찍은 사람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소나무는 여전히 기억에 남아있다고 했다. 이렇듯 우리의 기억은 조금은 엉뚱한 쪽으로 기울어져 있을 때가 있다. 눈의 중심부가 가려진 증상처럼 기억의 중심이 되는 포인트는 희미하고 주변부가 더 선명하게 남아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기억은 그 대상을 바로 기억하게 하지 않는다. 대상과 연결돼 있는 매개물을 통해서 우리에게 각인되어 있다. 기억하고 싶은 것보다 그 주변의 것이 더 생생하게 떠오르는 경험을 한 번쯤은 한 적 있지 않은가.

나는 간호사였다. 지금도 내가 간호사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눈치 챘는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악취를 잊지 못했으며 그녀의 퉁 부은 손이 내밀던 사탕을 아직 잊지 못했다. 그런데 그 끝으로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돌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같이하게 된다는 것이다.

논어에 ‘지난날의 일을 일러주었는데 앞으로 할 일을 이해하는구나!’ 라는 구절이 있다. 지난날을 잘 더듬어보자. 내일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가 거기에 있다. 아마 내일 나는 아몬드 사탕을 사러 하나로 마트에 갈 것이다.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최영미 시인·포항대학교 간호학과 겸임교수
서선미 기자 meeyane@kyongbu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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