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걸음 한걸음 마음으로 걷는 옛길···열두 고개 굽이굽이 사연도 한가득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주방과 마방이 있었던 탓으로 하룻밤 묵는 과객과 장사꾼들로 북적거렸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열댓 가구가 사는 한적하고 평범한 산골마을에 불과하다. 1980년대 초만 해도 불영계곡을 관통하는 36번 국도가 개통되기 전까지 십이령길은 울진과 봉화를 동서로 연결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장사를 했다. 울진에서 쇠치재-바릿재-샛재-너삼밭재-저진터재-작은넓재-큰넓재-고치비재-곧은재-막고개재-살피재-모래재 등 열두 고개를 넘어 봉화까지 150리 넘는 길을 오가며 장사를 했다.
바람이 시원하다. ‘조령성황사(鳥嶺城隍祠)’ 당집이 눈에 들어온다. 1819년 지역주민과 보부상이 만들어 휴식처로 이용하기도 하고 제를 올렸다. 처음엔 부상(負商)들이, 일제 강점기 이후에는 선질꾼들이 십이령을 오가며 제를 지냈고, 선질꾼이 사라진 이후에는 마을에서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정면 입구에 ‘조령성황사’ 편액이 걸려 있다.
성황사에서 대광천 초소 물길을 만날 때까지는 완만한 내리막에 그늘진 숲길로 십이령길에서 가장 마음 편한 구간이 아닌가 싶다. 삼거리 이정표에서 곧바로 내려오면 대광천 초소 쉼터다. 맑은 물이 흐르는 물길을 두어 번 건너면 불영계곡과 소광리 금강소나무숲을 잇는 너삼밭 공터에서 도로 따라 걷다 오른쪽 어두운 숲으로 들어선다. 소광2리까지 고개를 두 개 더 넘어야 한다. 한동안 인적이 끊어졌던 숲에 야생화가 피었다. 너삼밭재 오르기 전 화전민 터와 보부상들이 밥을 지어 먹거나 방아를 찧던 흔적이 남아 있다. 마지막 고개인 저진터재에서 울진 흥부(지금의 부구) 지방에 전해오는 구전 민요 십이령가(十二嶺歌) 일부분인 바지게꾼 노래를 숲 해설사가 들려주었다.
“미역, 소금, 어물지고 춘양장 언제 가노/대마, 담배, 콩을 지고 울진장을 언제 가노/반평생을 넘던 고 이 고개를 넘는구나/서울 가는 선비들도 이 고개를 쉬어 넘고/오고 가는 원님들도 이 고개를 자고 넘네/꼬불꼬불 열두 고개 조물주도 야속하다/가노가노 언제 가노 열두 고개 가노/시그라기 우는 고개 내 고개를 언제 가노”
다시 내리막을 30분 정도 더 걸어가면 십이령길 종점인 소광2리 옛 소광초등학교 운동장에 들어선다. 거의 한나절 넘게 걸린 여정이 끝난 것이다. 어깨를 짓누르는 해산물을 지고 내륙을 향해 걸어야 했던 고달픈 바지게꾼의 애환을 느끼기 위해 가벼운 배낭을 메고 이 길을 찾아오고 있다. 이처럼 과거와 현재를 이어 주는 옛길은 원형을 잃어 자연으로 돌아가기 어려워졌지만, 의젓하게 오래된 시간의 크기만큼 넉넉함을 우리에게 그 공간을 내어 주고 있다. 길은 변하지만,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 금강소나무 숲길은 예약제로 운영되며 탐방 인원은 각 구간별 80명이다. 최소 3일 전 인터넷(www.uljintrail.or.kr)이나 산림청 울진국유림관리소(780-3940~3)로 하면 된다. 모든 구간 오전 9시에 출발하며 숲 해설가가 동행한다. 참가비는 없다. 십이령길 출발지는 울진군 북면 두천1리 237(십이령로 2273)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