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미국 대통령도 취임식 땐 연방 대법원장 앞에 손을 들고 선서한다. 사법부의 위상과 최고 권력자도 법에 따라 통치한다는 법치주의 정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의 닉슨 대통령은 자신이 임명한 대법원장에 의해 물러나야 했다. 도청 테이프를 제출하라는 하급법원의 요청을 닉슨이 거부하자 당시 위렌 버거 연방 대법원장과 대법관 8명은 만장일치로 공개 명령을 결정했다. 이 결정으로 닉슨은 결국 하야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자신이 임명한 연방 대법원장 얼 위렌과 브레넌 대법관이 흑백분리정책을 위헌이라고 선언하는 등 행정부 정책과 반하는 판결로 일관하는 바람에 곤혹을 치렀다. 그 때문에 아이젠하워는 퇴임 때 “재임 중 두 가지 실수가 대법원에 앉아 있다”고 했다.

미국 연방 대법원장들은 ‘견제와 균형’이라는 민주주의 원칙에 충실했을 뿐 아니라 시대를 앞서가는 판결로 나라의 좌표를 바꾸는 조타수 역할을 해 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법행정을 총 지휘하고 대법관 임명 제청권을 포함, 모든 법관에 대해 독립적인 인사권을 갖고 있는 대한민국 대법원장이 법대로 한다면 세계서 유례가 없는 강력한 권한을 갖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대법원장들이 이 같은 막중한 권한을 제대로 활용해 제 역할을 해 왔다고 믿는 국민은 별로 없다.

“외국 순방을 나갔던 대통령이 귀국할 때 공항에 영접 나가는 의전서열 3위의 3부 요인으로 인식돼 온 것이 현실이다” 한 판사의 독백이다. 이런 중에서도 기개와 기백이 넘치는 대법원장도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 김병로 대법원장을 만난 대통령은 “어떻게 그게 무죄냐”고 따졌다. 현역 대위를 권총으로 쏘아죽인 민의원 서민호에게 정당방위라며 무죄 선고한 1심 판결에 대한 불만이었다. “판사가 내린 판결은 대법원장인 나도 뭐라 못한다. 유죄라면 상소하십시오” 김병로 대법원장의 대답이었다.

대법원 법정이 ‘판결 불복’을 외치는 시위대에 점령 당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는 등 사법부가 혼란에 빠졌다. 대법원장의 언행이 시류에 영합하면 사법신뢰는 끝이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