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코앞에서 바다가 남실거리는 방에
흰긴수염고래랑 함께 든 적이 있지

둘이 팔베개하고 초근초근
겹주름위에 쟁여두었던 말씀들을 되새김질할 때
나이롱 화투장 팔 껍데기 같은 바다 위를 낮게.
숨죽여 나는 낯선 건반

검은 해령(海嶺)을 가로 질러
바다 몰래 바다 깊이 가라앉는 그 음계(音階)의 죽지를 겨냥하여
낚시채비는 내가 날리고 / 너는 손톱을 또각또각

젖몸살하는 동공(瞳孔) 속 파도 어느 이랑에선가
솟구쳐 오를 / 악상(樂想)

니 눈썹처럼 흰 수평선 저 너머
그랜드피아노 한 대 / 둥둥 화물선처럼 떠 있겠지




(감상) 대왕고래인 흰긴수염고래는 바로 자신이 ‘그리워하는 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사랑하는 대상이 너무 크게 보여 시도조차 못하지만, 수평선 모텔에서 하룻밤 자고 싶은 꿈은 자주 꿉니다. 서로 가까워지려면 화음(和音)이 필요하고 수많은 희생이 뒤따릅니다. “화투장 팔 껍데기”의 그림이나 임의 “눈썹”이나 모두 둥근 수평선을 닮았으니, 다른 음계(音階)를 잘 이어주는 이음줄이 되어 줄 수 있답니다. 말하고 보니 글쎄 이음줄도 수평선을 닮았답니다. (시인 손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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