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 낙동강 그리고 철길따라 12㎞, 굽이굽이 발길 잡는 오지여행 성지

기차, 길, 강이 함께 하는 풍경
철길과 물길 그리고 찻길이 나란히 공존하는 길

오래 전부터 벼르던 길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가고 싶어 했고 예쁜 길이라고 했다. 석포역에서 승부역까지 이어지는 길은 한 편의 서정시다. 하나같이 칭찬해 마지않는 길의 풍경보다 더 마음에 와 닿았던 건, 사람이 길에게 부여한 이름이었다. 승부역 가는 길. 경북 봉화에 가면 석포역에서 승부역까지 철길 옆에 사람이 다니는 길이 나 있는데, 이 길의 이름이 ‘승부역 가는 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 길을 끝까지 다 걸으면 외로운 기차역 하나 서 있는 승부역이 나온다는 것이다. 미리 밝혀두지만 길이라고 해서 꼭 숲이나 흙길을 걸어야 한다는 편견을 버려야 한다. 승부역 가는 길은 인간이 만든 문명의 길이기에 더욱 그렇다. 철길과 물길 그리고 찻길이 나란히 공존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승부역은 경상북도 봉화군과 강원도 태백시가 경계를 이루는 내륙 깊숙한 지역, 해발 1000m가 넘는 산이 에워싸인 가파른 골짜기 안에 꼭꼭 숨어 있어 오지여행의 성지와 같은 곳이다. 예전엔 주변 산세가 하도 험해 자동차로는 갈 수가 없고 기차로만 갈 수 있었다. 지금은 자동차로 갈 수 있다. 석포역에서 승부역까지 12㎞ 길은 자갈길에서 시멘트로 최근에 아스팔트로 포장됐다. 행정구역상 승부역 가는 길의 시작점인 석포역과 끝나는 곳에 있는 승부역은 경북 봉화군에 있다. 하지만 석포역과 승부역 주변 마을의 생활권은 강원도 태백시다. 주민들은 강원도 강릉행 기차를 ‘들어온다’고 하고, 경북 영주행 기차를 ‘나간다’고 한다. 행정구역은 경상북도이지만, 생활구역은 강원도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에둘러 가는 길
승부마을이 경북도의 외딴곳이 된 이유는 승부역 바로 뒤에 우람한 산줄기가 버티고 서 있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이 산을 넘지 못하고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 다른 지역으로 장을 보러 다니고 학교에 갔다. 승부역 다음 역이 양원역인데, 철길로 3.7㎞이고 걸어서 가면 5.6Km 거리다. 자동차로 두 기차역을 오가려면 바로 잇는 도로가 없어 석포역까지 나온 다음에도 한참을 에둘러 가야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천천히 걸으라” 일러주는 물길 소리

석포역은 1946년에 만들어졌다. 작은 역을 빠져 나오면 승부역과 낙동정맥트레일을 알리는 이정표가 보인다. 승부역 가는 방법은 두 가지다. 낙동정맥트레일을 따라 가는 길은 험하고 힘들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포장도로를 걸어야 한다. 승부역 가는 방향 표지판을 따라 가다 보면 익숙하지 않은 풍경에 살짝 당황한다. 영풍이 운영하는 석포제련소 때문이다. 1970년에 준공됐다. 하얀 수증기를 뿜어내는 제련소에서는 고순도 아연을 이용해 황산 카드뮴, 황산동, 황산망간 등을 생산하고 있다. 낙동강 상류에 있어 종종 환경오염을 일으키는 곳이기도 하다. 석포제련소 공장 지역이 끝나는 굴티 지점까지는 트럭이나 차들을 자주 만난다. 그 이후는 차량 통행이 뜸한 편이다.

승부역 가는 길은 포장도로라 걷기가 편할 수도 불편할 수도 있다. 대체로 평탄했고, 자동차 두 대가 통과할 수 있을 만큼 넉넉했다. 십 몇 년쯤 이 길을 걸었을 때 먼지 폴폴 날리는 자갈길이었다는 걸 발이 기억해냈다. 제련소를 벗어나면 숨겨진 또 다른 세상이 나타난다.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초록은 햇살에 반짝이며 반겨준다. 승부역까지 동행해 줄 낙동강 상류 물길이 흐르고 건너편에는 철길이 나 있다. 가끔 지나가는 기차는 수면에 멋진 모습을 비추며 나타났다 사라진다. 기차가 지나갈 때 걷던 걸음을 멈추고 기차를 바라본다. 이렇게 한 걸음씩 걸으며 강과 이야기도 하고 나무들과 눈 한번 더 마주치며 걷는다. 갑자기 빠르게 지나가는 모든 것들이 안타깝다는 생각이 밀려든다.

산은 깊고 물은 맑다. 걸으며 만나는 강과 산의 모습은 한 폭의 풍경화다. 푸르고 푸른 산과 맑디 맑은 물, 그곳에 터전을 잡고 생명을 뿜어내는 자연과 사람들. 아무도 만나지 못해도 외롭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길은 우리네 인생처럼 가끔 오르막 내리막이 교차한다. 승부역 가는 길에는 몇 개의 마을이 드문드문 들어앉아 있다. 결둔·서낭골·마무이·본마을 등을 모두 합쳐 승부마을이라고 부른다. 세 시간 남짓 걷는 길이 내내 한적할 수밖에 없던 이유는 드문드문 있는 민가와 주민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한적하다는 표현보다 적요하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낙동강 발원지인 태백 황지연못에서 구문소를 지나 석포리에서 석포천을 받아들인 낙동강은 더욱 강폭을 넓히며 흐른다. 이제야 강이 강 같고 걷는 나도 나 같다고 느낀다. 산과 기차와 사람이 강물을 따라 승부마을로 간다. 문헌에 따르면 승부마을은 옛날 전쟁이 났을 때 이 마을에서 승부(勝負)가 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결둔마을도 군이 주둔한 마을에서 비롯됐다니, 삼국시대 군사 요충지였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지금 승부마을은 ‘부(富)를 잇는다(承)’는 뜻의 ‘승부(承富)’를 쓴다. 승부리(承富里)는 본래 안동군 소천면에 속했다가 고종 광무 10년(1906)에 봉화군에 편입됐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승부리가 됐다.

결둔과 마무이 마을 지나 하승부라 불리는 본마을에 들어왔다. 넓은 구릉을 따라 10여 가구가 띄엄띄엄 흩어져 있다. 한갓진 두메산골의 주 수익원은 감자, 양배추, 당귀, 옥수수다. 최근 사과농사를 짓기 시작했는지 과수원도 보였다. 예까지 걸어오면서 논을 본 기억이 없다. 낙동강만 부지런히 길을 쫓아왔다. 본마을에서 1.4㎞ 정도 더 들어가야 승부역이 나온다는 이정표가 보인다. 내리막을 따라 걷다 눈에 들어온 건 70m 길이의 주황색 현수교였다. 승부역에 가려면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이 다리를 건너야 한다. 승부역은 정말로 길이 끝나는 지점에 있었다. 까마득한 봉우리들이 좌우로 역사(驛舍)를 둘러싼 모습이 영락없는 천혜의 요새였다. 병풍처럼 에워싼 산 아래로 터널이 뚫려 있었다. 이 터널만이 산 너머 세상과 소통하는 창구였다.

승부역을 상징하는 표석
‘하늘도 세평 꽃밭도 세평’ 승부역

봉화군 석포면 승부리에 있는 승부역. 국내에서 가장 외딴 곳에 자리 잡은 기차역으로 꼽히는데 1956년 처음 문을 열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서고 처음 개통한 철도 노선이 강원도 태백 철암역과 경북 영주역을 잇는 영암선인데, 그 영암선을 내면서 승부역도 들어섰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화물차가 하루에 60번 이상 오갔을 정도로 활기찬 역이었지만, 인근 지역 태백의 석탄산업이 사양길로 접어들자 광부들이 떠나면서 지금은 하루에 열차가 몇 번 서지 않는 역으로 바뀌었다.

백두대간 협곡열차 V트레인
열차가 자주 서지 않지만 계절에 따라 눈꽃열차, 단풍열차, 백두대간 협곡열차 브이트레인(V-Train) 같은 특별 열차들이 오가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추억을 안겨주는 간이역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백두대간 협곡열차 모습
십 년쯤 전만 해도 찾는 이가 없어 기차역으로서 수명을 다할 뻔했다가 최근 들어 오지여행 성지로 떠오르면서 활력을 되찾았다. 사람들이 자주 드나드는 역은 아니었지만 곳곳에 아름다운 손길이 묻어있다. 산타 상징물과 흔들 그네 등 소박하지만 정감이 넘치도록 꾸며 놓았다. 사람이 많이 찾다 보니 승부마을 주민이 운영하는 간이 매점도 생겼다. 기막힌 풍경과 넉넉한 인심이 묻어나는 맛에 사람들이 승부역을 찾는구나 싶었다.

승부역 싱징 표석
‘하늘도 세평이요, 꽃밭도 세평이나, 영동의 심장이요, 수송의 동맥이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돌이 눈을 사로잡는다. 60년대 중반 승부역에서 오래 근무했던 김찬빈 씨가 철길 옆 바위에 페인트로 썼다는 글귀는 외딴 승부역의 위치와 특징을 한마디로 드러내는 상징물로 자리 잡았다. 이 글귀에서 ‘승부역 하늘은 세 평’이라는 소문이 발원했는지 모른다. 1955년 영암선(영주~철암 87㎞)이 이어지며 개통된 영동선의 마지막 난공사 구간이었다. 험준한 바위산을 뚫는 터널 공사와 계곡의 철교 공사 과정에 수많은 일꾼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이를 기리는 ‘영암선 개통 기념비’(이승만 글씨)가 철교와 터널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세워져 있다.

승부교 현수교 모습
이처럼 그저 걷는 것만으로도 말없이 흐르는 강물이 가슴을 촉촉히 적셔주듯이 시끄럽게 달리는 차도, 지나가는 사람도 없다. 산과 낙동강 그리고 철길따라 12km에 이르는 길을 굽이굽이 걷다 보면 마음이 절로 고요해진다.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묵묵히 걷고 싶을 때, 쉼표가 필요할 때 잘 어울리는 길이 바로 이 길이 아닌가 싶다. 외롭게 승부역을 지키는 역무원, 낭만을 안고 승부역으로 오는 여행자들, 그들의 숨결과 손길로 승부역 가는 길은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그 모든 것들을 품고 석포역에서 석포제련소-굴현교-결둔마을-서낭골-마무이-구두들-본마을-승부교-승부역으로 이어지는, 문명의 손길이 가득하지만 색다른 걷기를 경험할 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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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사진= 윤석홍 시인·도보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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